내가 그린, GREEN 그림 #프롤로그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보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김환기, 1973-
차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이사를 오니 왠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 졌습니다. 계절마다 바뀌는 풍경을, 아니 하루에도 해넘이에 따라 표정을 바꾸는 창 밖의 싱그러운 자연을, 그리고 그 작품의 틀에 머무는 작은 화분에 사는 초록이들을, 쏟아지는 햇살을 벗 삼아 쉬어가는 우리 집 애옹이들을 말이죠.
저는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어린 시절부터 그림과 종이접기, 하다못해 지점토로 만들기 등 미술활동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유치원 생활을 그만두고 미술학원에 가고 싶다고 떼를 써 유치원 조기 졸업까지 강행했을 정도로 그림에 대한 애정이 깊었어요. 초등학교 시절에 미술선생님에게 색을 보는 감각이 좋다는 정도의 칭찬까지도 받아본 기억이 있습니다만, 대학전공을 목표로 삼을 정도의 특별한 재주는 아니어서 그저 그 정도에 멈췄던 것 같아요. 그날도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조잘조잘 칭찬받았다고 자랑하는 정도의 이슈였죠.
그렇게 미술활동을 좋아하던 소녀는 점점 자라면서 그림과 차츰 멀어지게 됩니다. 학창 시절엔 공부하는 척(?)을 하느라고, 대학에선 신문방송학과 광고홍보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매주 논문 엇비슷한 과제를 내느라고... 는 핑계고! 친구들과 노느라고 그림을 끝내 취미로 삼지 못했습니다. 광고회사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현재 역시도 그림보다는 글에 더 가까운 직무인 카피라이터로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쓰는 취미가 더 부담이 없었죠.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실 다 핑계고요. 사실, 두려운 마음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잘 못 그리면 어떡하지?’,’다 큰 어른이 유아 수준의 근본 없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우습진 않을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즉 소위 말하는 미대 오빠, 미대 언니들을 '동경' 하는 마음이 크다 보니 배움 없이, 타고난 소질 없이 그리는 그림은 드러내기에 부끄러울 뿐 아니라 심하게는 그리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게 여겨졌던 것 같아요. 완벽하지 않을 것이 뻔하니 시도조차 망설여지는 마음이랄까요?
그랬던 저에게 가장 친한 미대오빠는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나요? 역시 타고나야 하는 건가요?“ 라는 제 질문에 너무도 뜻밖의 답을 줬어요.
그림 잘 그리는 법이요?
별 거 없어요. 그냥 그리면 돼요.
그림은 기술이 아니니까
그저 그리는 것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어요!
그래서! 그릴 것입니다. 용기 반, 무모함 반으로 시골 전원생활을 선택했던 것처럼, 그로 인한 영감으로 미루고 미뤄왔던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것처럼, 이젠 감추고 감춰왔던 제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갈증을 해소해보려 합니다.
제가 글로 제 안의 것들을 표현하듯 그림도 똑같이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부담 없이 자유롭게 던져보면 되는 거 아닐까요? 최근 다녀온 미술관에서 주워 온, 이 글의 서두를 열었던 김환기 선생님의 말씀이 마침 다시금 제게 용기를 주기도 했고요. 미술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씀.
바깥 풍경이 가장 잘 보이는 창 앞에 그림자리를 만들 거예요. 두껍고 예쁜 노트와 아이패드 그리고 형형색색의 색연필과 크레파스를 무심한 듯 툭 올려두고 그리고 싶을 때마다 그저 그냥 그려보려고요. 제 가장 가까이엔 거꾸로 붓을 잡아도 "잘한다! 잘한다!" 외쳐 줄 제 전용 미술 과외 선생님도 계시니까요.
그래, 그까잇 거 그려보자!
그냥 스쳐 보내기엔 우리 집 풍경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