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길리T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배로 약 2시간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길리섬’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곳은 행정구역상 롬복에 속해 있는 섬들로, 실제로 롬복에서는 10~20분이면 도착하는 세 개의 섬이다. 길리 트라왕안, 길리 메노, 길리 아이르. ‘길리’가 사사크어로 ‘작은 섬’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사실 ‘길리섬’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이상하다. ‘작은 섬섬’이 되므로.
길리 제도 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길리 트라왕안이다. 비슷비슷하지만 그나마 세 개의 섬 중 가장 큰 섬으로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나 음식점 등이 잘 조성되어 있다. 2주간의 발리 여행을 갔다가 ‘발리까지 왔는데 길리도 한 번 가봐야지?’라는 마음으로 들른 길리T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여전히 ‘발리보다는 길리!’라는 찬사를 보낼 정도가 된 우리 가족. 에메랄드 빛의 맑고 투명한 바다에서 거북이와 함께 맘껏 수영하고 놀다가 해변에서 쉬고, 배고프면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후 자전거 뒤에 아이를 태우고 섬을 한 바퀴 일주하는 소소한 시간이 우리에게는 완벽한 행복이었다.
길리T에서 보낸 3일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다시 발리로 돌아가는 날 아침. 혹시라도 배 멀미를 할까봐 호텔 조식도 1인분만 시켜서 넷이 나눠 먹고, 멀미약도 시간 맞춰 챙겨 먹었다. 짐을 챙겨 나가니 비바람이 불어서 걱정했는데, 선착장에 도착하니 아침부터 어마어마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 깜짝 놀랐다. 이 시간에 나가는 배편이 이렇게 많았나? 알고 보니 작은 규모 회사 배를 예약한 사람들은 날씨가 안 좋으니 일찍 나와서 기다리라고 했다는 연락을 받았단다.
나는 출발 시간에 맞춰서 길리T로 들어올 때 받은 예약증을 목걸이 탑승권으로 교환하고 기다렸다. 어느 줄이 우리 배 줄인지도 모를 정도로 좁은 선착장은 어마어마한 인파로 꽉 차 있었고, 비바람까지 몰아치니 그야말로 난리통. 캐리어에 아이들까지 챙겨야 하니 정신 바짝 차리고 물어물어 줄을 찾아 섰는데, 우리 배는 다행히 정시에 출발 예정이라며 탑승하라고 했다. 날씨 때문에 걱정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널널했던 앞자리에 앉아서 아쉬운 길리T에서의 마지막을 사진으로 남기며 출발을 기다렸다.
10시가 땡 되니 출발한 배는 궂은 날씨도 상관없다는 위용을 뽐내며 앞으로 나아갔는데, 출발과 동시에 거센 파도에 저항하며 배가 힘겹게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파도가 엄청 심해서 배가 붕 떴다가 쿵 떨어지고, 다시 붕 떴다가 쿵 떨어지기를 반복했는데, 놀이기구 타는 것보다 훨씬 무섭고 힘들었던 파도 타는 배에 앉아 있는 것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5초에 한 번씩 엉덩이가 붕 떴다가 쿵 떨어지는 게 반복되면서 멀미가 급속하게 진행됐는데, 멀미약이 듣지 않을 정도로 심해서 급기야 아이들은 배 안에서 토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직원들이 왔다갔다하며 검은 봉지를 나눠주고 있었고, 주변을 살펴보니 어른들도 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른들도 이 정도인데 애들은 얼마나 힘들까...
“늘봄아 미안해, 엄마 따라 맨날 여행 다니느라 이렇게 힘드네.”
“엄마, 괜찮아요.”
아직 만 4세였던 둘째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잡이를 있는 힘껏 꼬옥 잡고 견뎌내고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갑자기 선착장에 정박했다. 지도를 보니 롬복의 한 선착장. 혹시 날씨 때문에 더 이상 못 가는 걸까?
알고 보니 내가 예약한 배가 직항이 아니라 경유였던 것! 배 컨디션과 출발 시간을 고려하여 예약한 배편이 경유하는 배였다는 건 예약과 동시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남편은 이때다 싶었는지 갑자기 배 밖으로 뛰쳐 나가더니 비바람을 뚫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디 간 거지? 아이들 챙기랴, 짐 챙기랴 정신없던 나는 도착 시간은 더 늦어지겠지만 잠시 쉬어갈 수 있어서 미세하게나마 한숨 돌렸다.
남편이 돌아와서 착석하니 금방 배가 출발했다. 드디어 발리 빠당바이로 향하는 건가? 길리T에 들어올 땐 너무나도 잔잔해서 배가 움직이는 것조차 못 느꼈던 바다인데, 이렇게 우리가 돌아가는 날 갑자기 험상궂어지다니.
출발과 동시에 다시 시작된 험난한 시간. 그때 스텝이 다가오더니 뒤쪽 자리로 옮기라고 한다. 알고 보니 앞쪽이 훨씬 더 멀미가 심한 자리라고..! 그것도 모르고 여기서 고생고생하며 버티고 앉아있었다니... 온전한 빈자리가 없어서 양해를 구하고 한 명씩 앉혔는데, 첫째가 또 토를 해서 주변 사람들한테 미안했다. 젊은 스텝들은 토하는 걸 보고 서로 ‘네가 치워!’라는 눈치를 웃으며 주고받았는데, 흥, K아줌마를 뭘로 보고? 걱정 마시죠, 내가 알아서 흔적도 없이 치울 테니. 토 치우랴, 아이들(영혼 나간 남편까지) 케어하랴 또 정신없는 와중에 다행히 푹 잠든 세 남자. 사실 나도 멀미에 매우 취약한 사람인데 이상하게 이번에 멀미약이 잘 들었나 보다. 세 남자 케어하라는 하늘의 계시인가?
드디어 빠당바이에 도착하니 스텝들이 우비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여전히 거센 비바람에 짐 찾아서 나가는 것도 일이었지만, 5초 간격으로 엉덩이가 붕 뜨는 배 놀이기구를 타는 것보다 백 배 천 배 나았다. 잠에서 깬 아이들은 언제 힘들었냐는 듯 순식간에 컨디션을 회복해서 씩씩하게 밖으로 나왔고, 그 옆에는 슬프게도 급격히 늙은 얼굴의 남편이 있었다...
우붓에 가기 위해 미리 예약해 둔 리무진을 타니 기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날 우리가 탄 배를 마지막으로 이후 모든 배가 결항되었다고. 길리T를 탈출하지 못한 수많은 여행자들은 여행 스케줄이 꼬이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이게 내 일이 될 수도 있었는데 운이 좋았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운이 좋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헷갈리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험난한 길리T 탈출기는 여기까지.
[추신]
1) 경유지 롬복에서 잠시 사라졌던 남편은 어딘가에서 몰래 잔뜩 토를 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2) 가장 멀미가 심할 때 첫째가 토하면서 나한테 소리쳤던 말,
“그러니까 엄마, 여행 좀 작작 다니라고 했지!!!!!”
나중에 멀쩡해지더니 나한테 또 여행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