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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긍정 Aug 08. 2019

초라한 연애의 뒷모습

긍정의 서재 책리뷰 <경애의 마음>

“네스트 호텔 어때?” 7월 말, 남자 친구의 생일이 다가와 친구 B에게 어디서 자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다. 그의 생일쯤 그가 좋아하는 외국 래퍼의 내한 공연이 잡혔다. 끝나면 늦은 시간이라 근처 호텔에서 숙박하는 게 어떨까 얘기가 나왔다. 십만 원이 넘어가는 큰 금액이라 고민스러웠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작년 내 생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내 생일이 지나서 챙겨주었지만 정작 그런 건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서운하긴 하지만 나는 그의 구멍 난 주머니 사정을 잘 아니까. 친구에게 그가 내 생일을 챙겨주지 않는 것조차 이해한다며 자랑인 양 말했다. 그녀는 내게 “난 네가 습관적으로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좋아서 한다면 내가 할 말은 없지만”하고 한소리를 했다.


책 <경애의 마음>에는 대학 선‧후배로 만난 산주와 경애가 나온다. 산주는 경애와의 6년간의 연애 끝에 경애의 선배인 그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어. 하고 고백한다. 경애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냐고 묻자 그는 그냥 자연스럽게, 내가 너를 좋아했던 것처럼. 하고 답한다. 이후 그는 경애의 선배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렇게 3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경애는 산주의 물건을 버리지 못한 채 그의 주변에 머무른다. 이내 부부 사이가 벌어지자 산주는 옛 연인 경애에게 연락한다. 잘 지내냐고. 그렇게 산주가 경애를 버렸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관계를 다시 시작한다. 연인도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설명할 단어가 존재하지 않은 애매한 관계를.


내 마음은 산주를 만나는 경애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 애저녁에 버렸어야 할 물건을 버리지 못한 마음을 지니고, 나를 버린 적 있던 그 사람에게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마음. 남자 친구에게 새로운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2017년 가을이었다. 2013년 5월부터 연애를 시작한 우리는 매해 다른 이유로 이별을 반복했다. 2017년 2월, 정말 마지막인 듯 이별했지만, 그때도 붙잡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데이트 후 그가 먼저 잠들었을 때였다. 한 시간 간격으로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날따라 그의 핸드폰이 자주 울리자 몰래 그의 핸드폰을 열어보는 버릇이 꿈틀거렸다. 메시지를 들여다보곤 심장 소리가 낮게 쿵쿵거렸다. 낯선 이름의 그녀와 나눈 달콤한 메시지들. 둘의 제주도 여행 사진까지 보자 설마 했던 마음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눈앞에 싸구려 유리컵이 깨지듯 산산조각 난 믿음을 받아들이기엔 나는 무방비 상태였다. 그동안 나는 그를 투명하게 잘 안다고 자신하곤 했으니까. 잠든 그를 옆에 두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제야 그의 미심쩍었던 행동과 말들이 하나의 실로 꿰어졌다. 다시 만난 뒤 그가 종종 내게 하던 말 "우리 사귀는 거 아니잖아. 그치?" 장난기 어린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편지 한 장에 무너진 내 마음을 남겨두고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와 헤어진 뒤 그의 변명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오해라고, 본인은 관계를 시작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계속해서 연락하고 따라다녔다고. 헤어진 동안 내 안에 두 개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싸웠다. 하나는 그런 건 바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관계의 흐름이라고 그를 옹호했고, 다른 하나는 속도 좋다며, 그 변명을 믿냐고 나를 비웃었다. 오랜 시간 그 변명을 바라보자 천천히 그를 옹호하는 목소리에 나는 넘어가 버렸다. 관계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변하는 거라고. 사랑은 감정인데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가 있냐고. 그런데 여전히 나는 그가 좋은데 어떡하냐고. 그날 밤 나는 달리는 택시에서 술에 취한 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10개월 만이었다. 잘 지내냐고.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산주와 경애처럼 자연스럽게 다시 관계를 시작했다.


시작은 자연스러웠지만, 관계는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나를 다시 만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나는 친구들이 모르게 그를 만났다. 머리론 그를 만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좋아하는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어 그를 만나는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조용한 주말을 같이 보냈고, 다음날이면 그와 나는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회사에서 누군가 남자 친구 있어요? 하고 물으면 그를 남자 친구라고 해도 될지, 아니면 없다고 해야 할지 망설였다. 이 관계가 서로의 성욕만을 해소하는 '섹스파트너'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기엔 우린 서로의 깊숙한 곳에 자리해 있었다. 그의 어려워진 가족 사정을 알고 물심양면 도운 것도, 그의 오랜 꿈을 알고 응원하는 것도 모두 나였다. 그런 내가 여자 친구가 아닐 순 없었다.


그런데 문득 목 뒤가 서늘해질 때가 있었다. 책을 읽다 '제주도'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가 나 몰래 그녀와 떠났던 여행이 떠올랐다.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출근하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그의 일상을 나는 전혀 몰랐고 모를 것이었다. 그런 동안에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는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믿음과 배신을 양 끝에 두고 출렁거리는 다리 위를 아슬아슬 걷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그를 만나 소소한 데이트를 하고 있노라면 우습게도 결혼을 꿈꾸곤 했다. 사랑의 결실 = 결혼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우리의 연애 끝엔 '결혼'이라는 제도가 마중 나와 있길 바랐다. 어쩌면 결혼한 이들도 이렇게 사는 건 아닐까. 다른 이성에게 한눈판 상대를 미워하고, 받아주고 그렇게 다시 서로 사랑하고. 그러면 우리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어느 저녁, 그는 내게 물었다. "나 왜 다시 만나?" 그동안 만나면서 빙글빙글 남의 얘기만 겉돌다가 그날에서야 그는 날 선 눈빛으로 물었다. 좋으니까. 그런데 더이상 나는 오빠에게 믿음이 없어.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걸 알게 된 뒤부터 내 믿음은 산산조각 났거든. 이렇게 상처로 얼룩진 내 마음을 보여주면 그가 내게 확신을 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건 내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우리는 다퉜다. 하루 몇 분 안 되는 통화 중 성의 없는 대답을 하는 그가 미웠다. 서운하다는 내 말에 그는 서둘러 사과했지만 복잡한 마음에 3일 동안 연락을 안 했다. 실수한 그도, 서운한 나도. 3일 만에 연락한 그는 내 연락이 없는 3일이 자연스러웠다고 했다. 그만 만나고 싶은 거냐고 묻자 그런 것 같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의 빠른 인정에 서운한 감정이 북받쳐 한동안 멍하니 컴퓨터의 빈 화면을 응시했다.


처음 책을 읽을 땐 산주를 향한 경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산주는 경애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 모르는데 왜 경애만 그걸 모를까. 혼자 남겨진 경애의 마음이 그저 안쓰럽기만 했다. 그런데 두 번 읽자 어쩐지 산주와 경애의 이야기가 꼭 그와 내 이야기 같아서 경애의 마음을 헤아릴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초라한 연애의 뒷모습을 보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경애의 모습에서 지난날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의 마음이 활자 사이를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나는 산주 곁에 머무르는 경애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 아니었다. 그저 초라한 경애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기 싫었던 것이었다.


이별을 받아들이자 나는 여태 뜨뜻미지근한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연애가, 그의 사랑이 만족스럽지 않으면서도 끝낼 용기가 없어 이것도 사랑이라며 합리화했다. 그저 비싼 선물을 하면 그게 사랑처럼 보일 거라고 착각했고 서운한 마음을 감추고 그의 구멍 난 주머니 사정을 이해하는 척 넘어가면 우리의 관계가 괜찮을 줄 알았다. 소설 속 산주의 모습에서 빈 껍데기만 남은 그를 보았고, 이제는 끝내야 할 때라는 게 선명하게 다가왔다. 책을 덮자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애저녁에 버렸어야 하는 그의 물건을 이제는 놓아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경애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 보려 한다. 경애를 위로하는 상수의 말대로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긴 했지만 파괴되진 않았으니까(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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