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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긍정 Aug 13. 2019

식다

긍정의 서재 책 리뷰 <시옷의 세계>

어제 너를 만났다. 약속했던 시간 여섯 시 반을 한 시간 앞뒀을 때, 전화를 걸었지만 응답이 없었어. 소리샘으로 두 번 넘어갔지. 이 주 만에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어. 익숙한 불쾌감이 나를 덮쳤어. 또 깊은 잠에 빠져 못 일어났구나. 한숨을 내쉬었어. 그래도 괜찮아. ‘술집에서 밤에 일하느라 피곤할 테니까. 서점에서 책 읽으며 기다려야지’ 생각했어.


너는 두 시간이 걸려 도착했어. 수염이 덥수룩한 채. ‘어디를 갈까?’하고 묻는 내 질문에 자취방 근처 가장 싼 포장마차 이름을 말했어. 한숨이 나왔어. 이 주만에 만난 날에, 다음날 연차를 쓴 일요일에 저렴한 포장마차는 가고 싶지 않았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근사한 곳에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거든.


얼굴을 보자마자 너는 씨익 웃으며, 보고 싶지 않았냐고 물었어. 보고 싶었다는 의무적인 대답과 함께 묘한 죄책감이 사로잡혔어. 나는 어플로 이곳저곳 알아본 뒤, 함께 갈 술집을 찾았어. 술을 한 병 시켰고, 음식이 나올 때마다 나 먼저 한 그릇 가득 퍼주는,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에 새우를 하나 더 얹어주는 너의 다정함을 나는 곁에서 지켜보았어. 한 병을 비우고, 너는 “어떻게 계산할 거야?”라고 물으며 넌지시 내게 돈이 없다고 언질을 주었어. 술집을 나와 영화관으로 향했어. 영화를 함께 보고 감상을 나누고 싶었는데, 피곤했던 나는 영화관에서 잠이 들었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마음은 실패하고 말았어.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이내 잠이 들었어.

낮과 밤이 뒤바뀐 너는 내 곁에 누워 함께 잠을 청했고 새벽녘에 깨 라면을 끓여 먹고 다시 잠이 들었어. 너는 잠결에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는데, 나는 ‘나도’라고 말하며 꿈결에 죄책감을 느꼈어. 사랑의 말을 들었기에 의무감에 대답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꿈속으로 뒤따라왔어.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혼자 밥을 먹고 네가 일어나길 기다렸어. 기다린 지 두 시간쯤 흘렀고, 너는 한 시간 뒤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해야 한다고 했어. 갑자기 허무하게 하루를 버린 기분이 들었어. 너를 편히 만나기 위해 쓴 연차였지만, 아깝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그런 생각이 드는 내가 싫다가도, 눈뜬 지 한 시간 만에 떠나는 네가 미웠어. 나는 울적한 기분이 들어, “하루 동안 한 게 별것 없네”하고 퉁명스레 말했어. 네가 일찍 잠들었잖아. 하고 너는 내게 말했어. 그러고는 이해해 달라고 말했어. 3월부터는 나아질 거라고. 그런데 나는 너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았어. 오히려 ‘너와 나는 너무 다르다고. 평일에도 출퇴근 인사만 겨우 나누고,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술 마시는 관계’라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어. 우리 관계는 더는 나아지지 않고 제자리걸음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고개를 떨구었어.


너와 만난 하루를 돌이켜보니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듯한, 무심한 행동들을 수도 없이 반복했어. 볼에 뽀뽀해달라는 너의 장난에 따갑다며 고개를 획 돌려버렸고, 집에 온 손님인 너의 옷을 걸어두지도 않고 못 본 채 하고 이불속으로 들어갔어. 화장실은 몇 달째 청소하지 않은 탓에 더러웠고, 무엇보다 늦게 잠드는 너를 위해 깨어있으려 노력하지 않았어. 네 앞에서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는 나를 보며 너를 사랑하긴 하는 걸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어.


헤어지기 전, 커피를 마시는데 울적한 내 표정을 보던 너는,”다음 달에 어디 놀러 갈까? 캠핑 갈까?” 하며 무수한 제안을 던졌어. 나는 그동안 네가 던진 제안이 실제로 이뤄진 적이 없던 기억을 떠올리며 실망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가로로 저었어. 너는 내 울적한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는데, 그럴수록 나는 퉁명스레 짜증을 냈어. 우리가 서로 너무 다른 삶을 오래도록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진 하루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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