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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긍정 Sep 07. 2019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자존심도 없이 웃었다

긍정의 서재 책 리뷰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진짜 얼굴에 감정이 안 드러나. 부럽다” 그때 친구 E는 놀랍다며 혀를 내둘렀다. 자신은 그게 안 되는데 나는 놀라우리만큼 감정을 잘 지운다고. 그때는 그게 포커페이스라서 사회생활하는 데는 좋을 거라고. 부럽다는 그녀의 말에 잠시 으쓱했던 것도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그 능력은 내 장점이 아닌 걸림돌처럼 여겨졌다. 기분이 상해도 불편하다는 티도 못 내고, 겉으론 어색하게 웃으면서 속으로는 삭였으니까.


난 늘 인간관계가 힘들었다. 그 관계는 친구였던 때도 있었고, 동료, 애인, 가족일 때도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방심하고 있던 나를 푹 찌르는 송곳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이들이었다. 갑작스러운 지인의 날카롭고 배려 없는 언행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자존심도 없이 웃었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아, 그때 이렇게 쏘아붙였어야 하는데’하고 이를 바득바득 가는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꼭 하루가 지나서 반응이 오는 나는 갈등을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참 오래 걸렸다. 갈등은 부정적인 거라고 배운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인지 나는 늘 감정을 제때 느끼지 못했다.

Photo by Brooke Cagle on Unsplash


이런 성격을 갖게 되기까지 두 살 터울의 오빠가 톡톡한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오빠는 지독히 예민했다. 오빠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컴퓨터를 하고 있기만 해도, 느적느적 컴퓨터 의자에서 비켜도 불같이 성질을 냈다. 엄마에게 말대꾸만 해도 내게 한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조용히 감정을 얼굴에서 지우는 법을 배웠다. 조금이라도 기분 나쁜 듯한 내색을 비추면 오빠의 예민은 폭발했고, 갈등은 언제나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 그럴 때마다 오빠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화를 냈다. 나는 겁에 질려 숨죽인 채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오빠의 폭력과 폭언에 익숙해질 때쯤 내가 살기 위해 배운 건 기분이 나빠도 괜찮은 척 표정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감정을 짓누르는 게 익숙한 수동적인 어른으로 자랐다.

Photo by sam bloom on Unsplash

그렇게 고장 난 감정 시스템은 친구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반응했다. 대학생 시절 친구 K와 밥을 먹을 때면 내가 원하는 메뉴보다 K가 더 원하는 메뉴에 맞추었다. 나는 “뭐 먹을래?” 하고 묻고선 한식, 일식, 중식, 학식 등 서너 개를 던지면 그 안에서 K가 고르게 했다. 메뉴를 고르는데 기싸움은 그만하고 싶었거니와 내가 던진 메뉴 중에서라면 뭐든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대체로 메뉴를 고를 때면 둘의 공통분모로 수렴되었지만 내가 던진 메뉴가 탐탁지 않을 땐 K의 선택이 곧잘 받아들여지곤 했다.


그런데 한 학기 내내 그런 식의 메뉴 고르기가 이어지다 보니 슬슬 짜증이 났다.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있는 날엔 더 그랬다. 여름날 냉면이 먹고 싶다던가, 비 오는 날 매콤한 짬뽕이 당기는 날은 특히 그랬다. 내가 포기한 만큼 돌아올 거라 믿었은데. 애석하게도 내가 상대에게 준만큼 돌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언짢다는 걸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만 하다가 그저 편한 방법을 택했다. 서운한 감정을 지우는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 관계는 아무 일이 없을 테니까. 그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으니까.


K가 약속 시각에 늦는 건 예삿일이었다. 4시간짜리 수업에 1시간 늦는 거야 본인 일이라지만, 친구인 나와 만나는 약속이라고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30분 늦는 건 일상이었고, 미안하다는 사과는 자주 잊었다. 그렇게 친구에게 싫증이 날 때쯤 우리는 종강을 맞았다. 그럴 때면 마음 가득 친구를 지독히 미워했다. 한 소리할까 하다가 이내 그저 '너무 가까워진 탓이야'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말을 하는 건 내겐 너무 힘든 일이었고, 갈등은 위험한 일이니까. 그렇게 감정을 지우고 합리화를 하면 편했다.

Photo by Gemma Evans on Unsplash.

그런 점을 빼면 우리는 취향이 잘 맞았고 그래서 가까이 지냈다. 패션과 책, 대화를 좋아했던 K와 나는 독서 모임도 만들어 주기적으로 만남을 이어나갔다. 나는 패션 회사에서 매장 관리직으로 일했고, 그녀를 소개해주었다. 우리 관계에 균열이 생긴 건 내가 그녀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녀가 나와 함께 일하게 된 지 3개월쯤 흘렀을까.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승진의 기회는 바늘구멍만 했고, 서비스업 자체에 질려버렸던 게 이유였다. 퇴사 후 6개월 동안 쉬면서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나는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다.


일이 내게 남기고 간 바퀴 자국을 들여다보며 지냈다. 내가 어떤 부분에서 마음이 다쳤는지, 어떤 것들이 나를 힘들게 했는지. 하나하나 적어나가자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일하며 지냈던 1년 6개월 동안 끝끝내 참아냈던 울음이 글을 쓰자 살풀이를 하는 것처럼 멈추질 않았다. 그동안 스스로 내 마음을 많이 외면했구나. 나를 돌보지 않았구나. 지나간 감정을 글을 쓰며 되돌아보았다.


내가 쓴 글에 피드백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좋다는 말을 귀담아들었다. 독서 모임을 하며 가깝게 지낸 친구들에게 내 글을 보여주자 그녀들은 각자 서비스업에 몸담았던 때를 떠올리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딱 한 명, 다른 말을 꺼낸 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K였다. 그녀는 내 글이 불편하다고 했다. 아직 그 회사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불편하다고. 그리곤 내가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것 같다며 인신공격을 덧붙였다. 내가 그녀의 입장까지 충분히 사려 하지 않았던 점을 사과했을 때, 내가 기대했던 건 인정과 사과였다. 그녀는 객관적인 피드백을 빙자해 주관적인 인신공격을 했으니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비판적인 피드백도 받는 연습 좀 해"라는 충고뿐이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균열이 일었다.


이후에도 K는 고장 난 내 감정 시스템의 분노 버튼을 자주 눌렀다. 그다음 해, 나는 K와 절연했다. 새로 만든 글쓰기 모임에서 K와 글쓰기를 함께 했을 때였다. 우리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모였는데, K는 본인만 해독할 수 있는 모스 부호 같은 글을 고수했다. 글의 결이 달라 함께 못할 것 같다는 말을 메시지로 전했을 때 K는 폭언을 쏟아냈다. 그녀의 말에는 '네가 날 감히?'라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자리에서 얼어버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갈등은 나쁜 일이라고 배운 나는 내 감정을 드러내버리면 이 관계를 망쳐버릴 거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Photo by Ritu Arya on Unsplash

결국 그녀의 공격적인 메시지에 나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감정을 지운채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폭언을 쏟아내는 그 순간에도 송곳 같은 말에 찔려 피를 철철 흘리면서 감정을 지우려 애썼다. 그러면 괜찮을 줄 아는 사람처럼. 이십 대의 절반을 함께 보낸 그녀를 침묵과 함께 떠나보내고 나는 오랫동안 관계를 망쳐버렸다는 부채감에 시달렸다.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탓에 내 안에는 분노가 차곡차곡 쌓였고, 그 분노는 천천히 탑을 쌓아 단번에 펑 터져버렸다. 무게를 버티지 못한 채 터져버린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렇게 K와 인연이 끊어지는 걸 바라보면서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고장 난 감정 시스템을 되돌리기 위해서 불편한 건 말해야 한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말해보는 연습을 이제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말하는 것보다 그 감정이 내게 존재하지 않는 척 보자기를 덧씌워 버리는 게 편한 나지만. 말하는 법을 터득해보려 한다. 불편한 걸 터놓고 나눠야 소중한 인연과 건강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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