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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긍정 May 05. 2020

내 이름 뒤에 작가라는 단어가 붙기 시작했다

브런치 작가 1년 차

Photo by @d_kopezhanov on @unsplash

작년 8월부터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회사 내에서 잠정적 대기발령 상태였던 그때 나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스니커즈 전문 온라인 스토어 P가 국내 1위 온라인 스토어에 팔렸기 때문이었다. 인수 합병된 패션 회사에는 매거진팀이 크게 자리했다. ‘에디터’라고 불리는 직원만 족히 20명이 넘었다. 반면 나는 동족 업계 경력을 지녔지만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직원인 듯 대접은 냉랭했다. 섬처럼 모두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나는 기계적인 업무가 모두 끝난 오후 4시부터 썼던 글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글쓰기 모임 ‘쓰당‘을 함께하는 시드니의 글이 브런치 메인에 올랐다. 한강 작가의 책 <흰>을 읽고 새아빠의 새치를 뽑아주며 가족이 된 이야기를 써냈다. 메인까지 오른 그녀가 부러웠다. 그녀의 용기에 힘입어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하고 글을 고치기 시작했다. 대체로 지난 글쓰기 모임에서 여기저기 손볼 곳을 지적받은 글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으나 추상적이라거나 글에 비해 제목이 아쉽다거나, 더 자세히 적어줬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받은 글이었다. 우선 당시 여러 공모전에 문을 두드렸던 가장 최근의 글부터 시작했다. 무료로 이미지를 다운로드할 수 있는 사이트에 접속해 글과 톤 앤 무드가 어울리는 사진을 몇 장 골랐다. 그리고 내가 찍은 책 사진과 좋았던 문장을 필사한 노트를 찍은 사진을 그러모아 글과 함께 엮었다. 몇 번의 맞춤법 검사를 통해 오탈자가 없는지 확인하고 발행하기 버튼을 눌렀다. 올린 지 얼마 안 됐는데 하트 몇 개가 눌렸는지 진동이 울렸다.



첫 글을 올리고 반응이 오니 신기했다. 블로그에 올릴 때는 조회수 100을 넘기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는데 아무래도 글 위주인 플랫폼이라서 그런지 단숨에 조회수가 100을 넘겼다. 시시때때로 오르는 조회수에 신이나 인스타그램에 수시로 들어가듯 브런치 어플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누르기 시작했다. 구독자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반응이 오자 그동안 감춰놨던 글을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했던 반응이 온 건 이모를 인터뷰한 글을 올렸을 때였다. 일을 잠시 쉬던 해 은유 작가님과 함께한 감응의 글쓰기 수업에서 마지막 합평에서 발표했던 글이었다. 당시 작가님은 한 사람의 생애사를  인터뷰를 통해 풀어내기를 주문했고 외할머니를 인터뷰하려고 한다고 말을 꺼내자마자 이모는 본인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라며 나를 앉혔다. 이모가 쏟아놓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담히 글로 받아 적어냈다. 들을 때도 눈물을 감추기 어려웠는데 글을 쓸 때도 마음이 동해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나왔다. 합평을 하러 가서 사람들 앞에서 읽어 내려갈 땐 꺼이꺼이 눈물이 차올라 읽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글을 고치고 다듬어 올리자 순식간에 조회수가 치솟았다. 한 시간마다 1000씩 늘어나더니 어느새 메인에 글이 걸려 있었다. 댓글이 하나둘씩 달리기 시작했는데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댓글창을 서성였다. 가부장제로 인한 젠더 문제인 만큼 갑론을박하며 댓글로 사람들끼리 싸워댔다.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성의 없이 댓글을 다는 사람 때문에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들이 나를 대신해 싸워주는 모습에 신기하게 그 광경을 지켜봤다. 내 글이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다니. 회사에서 쪼그라든 자존감이 조금씩 펴지는 기분이었다.

쓰당 글모임


그때부터 글쓰기 모임 ‘쓰당’ 언니들과 우리는 눈에 불을 켜고 공모전을 찾아 썼다. 대학내일에 기고해 원고료를 받은 은언니는 내게 더 자극을 주었다. 나도 글로 돈을 벌어먹고 살아야지. 그렇게 다짐했다. 이모의 글이 최고 조회수를 기록한 뒤로 엄마와 이모는 좋은 내 글감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빠 없이 나를 키운 엄마와 곁에서 그런 엄마를 물심양면 도운 큰 이모는 내게 애틋한 존재이자 애증의 존재였다. 함께 있다 보면 부대껴서 싫다가도 멀리 떨어져 지내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엄마와 이모의 이야기를 소재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뒤늦은 여름휴가를 떠났다. 회사에서 쪼그라든 자존감을 맑은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에 날려 보내고 싶어 제주를 찾았다. 휴가 중 메일 하나가 도착했는데, 출판사의 편집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나를 작가라고 불렀다. 작가님. 만나 보고 싶다고 조심스레 하지만 정중히 메일을 썼다. 글을 잘 읽었다고. 만나서 한번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했다. 뜻밖의 연락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보잘것없는 글을 보고 나를 작가라고 부르다니. 듣기 좋은 말인데 부담스럽게도 느껴졌다. 그녀의 정중한 제안이 부담스러워 망설이자 쓰당 언니들이 또다시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정말 잘됐다고. 드디어 쓰당에서 작가가 탄생하는 거냐며 축하해주었다. 용기에 힘입어 메일 속 그녀와 약속 장소를 잡고, 회사 근처에서 4시에 만남을 가졌다.

그녀와 만나 여러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어떻게 글을 쓰고 있는지 물었고 쓰당 언니들과 함께 모임을 가진다고 말했다. 그녀가 내가 썼던 글 중 엄마와 관련된 글을 읽고 연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말할 땐 어쩔 줄 몰라 커피를 연신 마셔댔다. 그 글의 제목이 정말 좋았다며 엄마 이야기를 꺼낼 땐 눈시울이 붉어져 울음을 꾹 참느라 애썼다.

출판 미팅을 하고 난 뒤 나는 거만해졌다. 출판 계약도 하지 않았는데 월급을 받은 듯 마음이 두둑했다. 그녀와 미팅을 한 그날 동네 친구를 만나 술을 한 잔 샀다. 다음날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자랑했다. 나보고 작가님이라고 부르셨다고. 우리 집안에 작가가 탄생할지도 모른다며 기세 등등했다. 그런데 연락을 준다던 그녀의 말이 무색하게 이후로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한 달이면 되려나, 두 달? 하는 생각이 들다가 어느새 지쳐버린 나는 그녀가 나를 만나고 실망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 달쯤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다 더 이상 그녀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녀가 인정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브런치 작가라고. 출판계에서 연락이 온 것뿐이지 그동안 해왔던 글쓰기를 꾸준히, 똑같이 해나가면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흘렀다. 그사이 그녀는 정신이 없어 연락을 못했다며, 다시 한번 만나보자고 미팅을 제안했다. 해가 바뀌고 쉬는 날엔 등산을 다니기 시작했고 2주에 한 번씩 만나 쓰당 언니들과 함께 책 한 권을 읽고 글을 써냈다. 서로의 글을 통해 안부를 확인하고 묵혀둔 감정을 글로 털어놓았다. 그동안 나는 구독자 300명을 돌파했고 글을 21편 발행했다. 나는 어느새 글을 발행하고 나면 메인에 올랐는지 안 올랐는지 확인해보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내 이름 뒤에 작가가 붙는다는 게 아직도 여전히 어색하지만 꾸준히 써 내려가 보려 한다. 아마추어 작가에서 출간 작가 되는 날을 꿈 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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