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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긍정 Aug 07. 2020

단 둘이 만나면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친구라는 경계의 금을 밟고 거니는 기분이었다

그와 단둘이 만나기 시작했던 건 지난 6월의 일이었다. 코로나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던 더운 여름이었다. 몰아치는 업무에 지쳐 휴식이 간절했던 나는 그에게 지리산 등반 겸 하동 여행을 제안했다. “6월에 지리산 갈래?” 하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좋지”라고 흔쾌히 대답했고 나는 그에게 여행 계획이라도 세우고 있으면 평일이 덜 괴로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여름휴가를 지리산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떠오른 얼굴은 당연스레 그였지만 그가 우선인지 지리산이 우선인지 그때는 선명히 알지 못했다.


이내 그는 지리산을 위해 배낭을 하나 샀다고 했다. 중고 거래를 했는데 직거래로 강남구청 사거리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나는 마침 회사 주변에 그가 온다는 얘기를 듣고 설렜다. 그를 향한 알쏭달쏭한 마음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고 언니들에게 털어놓았을 때 단 둘이 만나보라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단 둘이 만나면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잘 알 수 거야’라며 나름의 합리적인 조언에 마음을 기댔다. 그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마침 야근도 해야 하고. 만나서 밥 먹으면 딱이겠어!” 하며 이유를 둘러댔다.

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

등산할 때와 다르게 딱 붙는 원피스를 차려입고 그 앞에 섰을 때 어색하면서 긴장됐다. 뭐가 먹고 싶냐는 질문에 고기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대답에 어딜 데려가야 그가 좋아할지 곰곰 생각했다. 소박한 메밀국숫집에 도착해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단둘이라니. 이상하면서도 편안했다. 걸으면서 대화했던 적은 많았는데 등산복이 아닌 압구정 한복판에서 그를 마주하니 묘한 기분이 들어 애먼 휴지를 만지작거렸다. 풍경만 다를 뿐 다름없는 건 그의 까무잡잡한 팔, 다리와 방금 산에서 내려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의 자연스러운 옷차림새였다.


밥을 먹고 나자 그는 젤라또를 제안했다. 밥 사준 게 고마우니 젤라또를 사겠다고. 그와 걸으며 나누는 대화는 늘 좋으니 흔쾌히 따라나섰다. 그런데 세련되기로 소문난 압구정에서 등산복 차림에 등산가방, 발가락 양말까지 신은 그와 나란히 걸을 때는 조금 민망했다. 뽀송뽀송한 발을 만들어 주어 최고라면서 샌들 아래 발가락 양말을 자랑하는 그를 보며 ‘내가 정말로 편한가?, 친구 이상의 감정은 조금도 없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우정과 헷갈렸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을 땐 그와의 간격을 조금 두었다. 혹시 근처에서 퇴근하지 않은 회사 사람들을 마주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photo by Mark de Jong on Unsplash

젤라또 가게는 우리가 밥을 먹은 곳에서 버스로 3 정거장 거리였다. 나는 그와 오래도록 걷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대화의 끈은 끊기지 않은 채 이어졌고 나는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친구라는 경계의 금을 밟고 거니는 기분이었다. 나는 설렜고 그 앞에서 이런저런 회사에서의 힘듦을 토로하면 그는 받아주었다. 나는 자꾸 어디까지 가야 하냐며 투정했고 그는 몇 블록만 더 가면 된다고 타일렀다. 달콤한 젤라또를 취향에 맞게 고르고 젤라또 종이컵과 스푼을 양손에 나눠 쥐었다. 그는 피스타치오가 맛있다며 내게 권했고 나는 밀크티도 맛있다며 그에게 내밀어 서로의 취향을 음미했다.


젤라또가 반쯤 사라졌을 때 우리는 압구정 역에 다 다랐다. 헤어지는 게 아쉬웠지만 그는 압구정 역으로, 나는 회사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담백하게 손을 흔들며 “안녕”, 했고 나는 무덤덤하게 “잘 가”하고 대답했다. 그가 회사 앞까지 데려다주었으면 하고 몰래 바랐지만 은밀한 속마음을 들킬까 두려워 아무래도 괜찮은 척 인사를 하고 말았다. 남은 일을 마무리하려 회사로 돌아오는 길, 찐득해진 손 위에는 허전해진 젤라또 컵만 남았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비우며 오늘은 기필코 어떤 걸 느낄 수 있길 바랐는데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해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그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걸까?’하는 물음에 답을 찾지 못한 여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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