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서재, 영화 <빅 피쉬>
오빠와 대화 중이었다. 오빠가 이모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내게 묻고 있었다. 이모는 종종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감정을 이유로 화가 났고, 그 대상이 누구든 가족 모두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그러면 입을 닫은 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으로 “나는 화 안 났어”하고 말하곤 했다. 이모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이모의 그런 태도가 내 기분을 망쳐서 화가 난다고 말하는 오빠에게 이모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타이르고 있었다.
“오빠는 성격이 너무 급해. 급하니까 나는 괜찮아졌는데 왜 너는 아직도 화가 나 있냐고 따져 묻는 거나 다름없어. 이모는 나랑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라서 오빠가 그렇게 다그치고 왜 아직도 기분이 나쁜 거냐고 따져 물으면 이모는 더더욱 화가 안 풀릴지도 몰라. "
오빠의 에어비앤비 사업을 이모와 엄마가 도와주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방을 꾸미는데 도배고 장판이고 이모가 나서서 모두 해주었는데 오빠는 늘 이모가 한 번 화가 나면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곤 심한 말을 내뱉곤 했다.
화가 단단히 나면 그 마음을 혼자 꽁꽁 싸매는 이모가 지닌 감정의 문제가 내게도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을 어렴풋이 헤아리면서 이모가 되어보았다.
"오빠가 오히려 그동안 오빠의 일을 물심양면 도와준 이모의 노력을 치켜세워주고, 그동안 너무 잘해왔다고, 고맙다고 그런데 이모가 화가 난 채로 아무 말도 안 하면 당황스럽고, 난처하다고 말하면 이모도 마음이 조금 누그러질지도 몰라. 이모한테 필요한 건 격려와 응원이지, 채찍이 아니거든.”
그러면서 말을 잇는데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이모의 굳게 닫힌 마음을 헤아리는 말이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오빠는 같이 싸우고, 내가 화가 난 채로 집에서 쿵쿵, 씩씩대며 돌아다니면 오빤 눈을 부릅뜨며 내게 성질을 냈다. 뭐 때문에 그러냐며 성난 얼굴로 나를 다그치고 금방이라도 때릴 것만 같은 위협적인 행동으로 내 감정을 누르고 감추기를 강요했다. 그때는 휘몰아치는 감정에 어떻게 오빠에게 나의 마음을 설명해야 할지 알지 못해 눈물만 흘린 채 방문을 잠그고 울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이 돼서야 오빠가 "지난밤 화낸 건 미안했어" 하고 다 괜찮아진 척 말하면 내 마음의 상처도 다 아문 척 구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눈물을 흘리자 오빠는 최근 작사가 김이나의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를 즐겨 듣는다고 했다. 그중 정신의학과 원장이 나와 청취자들의 심리 상담을 해주는 프로그램을 주로 듣는다면서 말을 이었다. 최근 들은 사연 중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했다. 초등학생이던 딸의 훈육을 위해 매를 들어 혼냈던 아빠의 이야기였다. 이후 중학생이 된 사춘기 딸이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중년 아버지의 상담을 소개해주었다. "원장님은 아무 변명도 하지 말고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 어릴 땐 내가 폭력적이어서 너에게 상처를 너무 많이 준 것 같아. 정말 미안해." 그러면서 "근데 나도 그때는 나도 어려서... 앗 변명은 하지 말랬으니까 아무튼 미안해"하면서 내게 사과를 했다.
오빠와의 대화를 돌이켜 보면서 최근 본 영화 <빅 피쉬>가 떠올랐다. 오빠와는 다르게 사랑하는 가족에게 '사과의 말'을 남기지 못하고 떠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빅 피쉬>이다. <빅 피쉬>는 어린 시절부터 허풍 가득한 자신의 인생 모험담을 계속하는 아버지 에드워드와 갈등을 빚는 아들 윌이 나온다. 에드워드는 아들이 태어나는 날 일이 바빠 아내의 곁을 지키지 못했던 사실을 숨기기 위해 결혼반지를 이용해 거대 메기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윌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사실처럼 말하는 아버지를 참지 못하고 결혼식 피로연에서 언쟁을 벌인다.
결국 영화는 윌이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아버지의 방식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생생한 이야기를 지어 아버지를 떠나보내곤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나는 에드워드의 모험 같은 인생 이야기보다 윌의 상처받은 마음에 더 신경이 쓰였다. 화려한 모험담 이면에 윌은 가족을 등한시 여기는 아버지를 보았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어쩌면 윌은 사과받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끝까지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았지만, 윌이 듣고 싶은 말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변명의 여지 없는 사과가 아니었을까. 꾸며낸 이야기에 비해 진짜 이야기는 볼품없고, 형편없을지라도 어떤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선 때로 진실이 필요한 법이니까. 오빠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오랜 시간이 지나 내게 건넸던 사과의 말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