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미스 선샤인>을 통해 바라본 미의 기준
“머리 길러보는 게 어때?” 종종 두 살 터울의 오빠는 내게 물었다. 왜 짧은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는 거냐고 정말 이유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십 대를 건너며 새내기이던 스물 이외엔 내내 짧은 단발과 숏컷을 오갔다. 갑작스레 물을 때마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늘 대화는 끝이난 뒤였다. 작년에는 주말 아침 퉁퉁 부운 맨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끼고 밥숟가락을 뜨고 있는 내게 “진짜 편해 보인다”며 집에 있는 내게 안 꾸미냐고 핀잔하듯 말을 건넸다.
꾸밈에 대한 한마디는 회사에 가서도 이어졌다. 흰색 셔츠에 블랙 롱스커트를 입고 회사에 갔을 때였다. 탕비실 앞에서 회사 남자 동료를 마주쳤는데 나를 보자마자 “오늘 되게 신경 쓰고 왔네?”하면서 칭찬이라는 듯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칭찬인 줄 알면서도 어떻게 반응할 줄 몰랐다. “그래?”하고 반문한 뒤 대화는 끝이나 버렸지만 오래도록 그의 칭찬의 말을 혼자 되뇌었다. 그의 칭찬 뒤에 왠지 모르게 따라오는 불쾌함 때문이었다. 칭찬인 것 같은데 왜 기분이 나쁠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유는 끝내 찾지 못했다.
영화 <리틀 미스 선샤인>의 꼬마 주인공 올리브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서 열리는 어린이 미인 선발대회에 출전해서 우승하는 꿈을 갖고 있다. 텔레비전 속 우승을 거머쥔 미스 아메리카나, 미스 선샤인은 한껏 볼륨을 준 헤어스타일에 유려한 몸매를 자랑한다. 반면에 올리브는 볼록한 배에 사각 투명 테가 얼굴 전체를 가린 귀여운 모습이다. 동그랗고 오밀조밀한 얼굴에 매력적인 모습의 올리브이지만 어쩐지 화려한 모습의 꼬마 경쟁자들에 비교하자면 한참 뒤떨어진 듯 보인다.
하지만 가족 중 그 누구도 ‘올리브 네가 미인대회에 나간다고?’하며 올리브의 외모를 깎아내리거나, 조금 더 꾸며봐야 하지 않겠냐고 안달하지 않는다. 그저 미인대회의 장기자랑 시간에 올리브가 창피당하지 않도록 출전을 포기했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올리브의 선택을 응원해줄 뿐이다.
나는 그런 올리브와 올리브를 바라보는 가족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비록 올리브도 경쟁자들의 화려한 꾸밈에 조금 주눅 든 모습을 보일지라도 어설프게 그들을 따라 하려고 노력하지 하지 않는다. 올리브는 그저 자신이 할아버지와 함께 준비했던 장기자랑을 끝까지 마치는데 집중할 뿐이다. 미인대회가 정한 미의 기준은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귀여운 배를 내밀고 무대를 이리저리 방방 뛰어다니며 준비한 퍼포먼스를 끝까지 해내고 만다.
작가 키드는 책 <나도 몰라서 공부하는 페미니즘>에서 외모에 관한 칭찬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했다. 칭찬은 곧 내 기준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원하는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거창하게 포장해서 칭찬이라고 할 뿐이지 결국 상대에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맞추도록 종용하는 대화법이라는 것이다. 나는 미인대회가 정한 꾸밈을 강요하지 않는 올리브의 가족들이, 나아가 칭찬은 필요 없다는 듯 무대를 마치고야 마는 올리브가 좋았다. 미인대회에서 정한 전형적인 꾸밈이 아닌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예쁨을 추구한 올리브의 모습이 가장 빛나 보였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즘을 알고 난 뒤로 해결하지 못한 질문이 쭉 나를 따라다녔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면 탈코르셋을 선언하고 꾸밈 노동을 중단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다수의 페미니즘 책에서 탈코르셋을 주장하는 것과 반대로 나는 꾸미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소셜 미디어에서 다수가 좋아하는 예쁨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컬러의 아이템을 사고, 기분에 따라 코디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과 쾌감을 좋아했다. 어쩌면 페미니스트이더라도 무조건적으로 사회가 정한 ‘예쁨’을 포기하기보다 각자 개성에 어울리는 예쁨을 추구하면 되는 게 아닐까? 예쁨에도 한 가지 모양만 존재하는 건 아닐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