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서재 책 리뷰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퇴근 시간이 한 시간 가까이 지난, 주변 동료들은 모두 퇴근한 7시 무렵이었다. 회사를 4개월 가까이 다니며 보지 못한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의 중년이 남성이 눈에 띄었다. 어슬렁어슬렁 다니는 그를 처음 보곤 ‘내가 모르는 임원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조금 있다 내 자리로 와선 그는 내 자리 위 이름표를 보고 내게 말을 걸었다. “음 그래 보영이구나. 보영이. 보영이는 사진 편집 일을 하는 건가?” 그의 자연스러운 반말에 불쾌했고, 느끼한 그의 표정과 위계적인 분위기에 약간 겁을 먹었다. 그를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그는 점심시간 내 자리로 와 누런색 빵 봉투를 주며 “내가 먹다 남은 파니니인데, 이따가 배고플 때 먹어”라고 말하며 느끼한 표정으로 책상 위에 빵 봉투를 두고 갔다. 기대하지도 않은 친절을 억지로 꾹꾹 받은 듯한 기분에 언짢았다.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옆자리 동료, 상사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다. 상사에게 그가 누구냐고 묻자 새로 온 인사부장님이라고 말해주었다.
며칠 뒤, 동갑내기 동료들과 맥주 한잔 마시다 ‘인사부장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그의 첫인상이 나빴다고 말하자, 남자 동료는 그가 회사 사람들하고 친해지려 하는 노력을 너무 나쁘게 보는 거 아니냐며, “그건 네가 좀 예민한 것 같은데?”하고 말했다. ‘예민한 것 같다’ 말을 듣자 어이가 없는 동시에 ‘정말 내가 예민했던 걸까?’ 하며 자기 검열에 들어갔다. 정말 내가 이상한 건가 생각이 들어 며칠 뒤 여자 동료에게 ‘인사 부장님’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그녀는 “우리 팀 여자들끼리는 조심하자고 얘기 한번 했었어” 하며 불쾌했던 일화를 하나둘 털어놓았다. 한 번은 막내 직원에게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때를 틈타 초콜릿을 건네주며 “쪽쪽 빨아먹어”라며 세 번을 반복해 말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느낀 불쾌한 감정이 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뭔지 모를 안도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녁 10시, 압구정의 VIP 노래방. 2018년 초, JTBC에서 방영한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에서 본 듯한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어두컴컴한 노래방 안 여자 직원들은 마이크와 탬버린을 나눠 잡고 분위기를 한껏 띄우고 있었다. 20대부터 40대까지 남자 직원들은 우스꽝스러운 꼬불꼬불 염색된 가발을 뒤집어쓰고, 반짝반짝한 트로트 재킷을 입고 여자 직원의 트로트 선율 위로 몸을 실었다. 여자 동료들이 신나는 트로트를 부를 때 남자 직원들은 발라드를 부르며 분위기를 잡았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직원들을 보며 멀쩡한 직원들은 어쩔 줄 몰라 민망한 웃음을 나눴다. 인사부장은 신이 나서 여자 직원들에게 블루스를 추자며 손동작을 취하거나 어깨와 허리를 감싸며 추근댔다. 말단 직원들이 노래를 부르고 100점이 나오자 상금이라며 현금 만원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다음날 뒤늦게 들었다. 그는 이미 1, 2차 술자리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성희롱 발언을 일삼았다. 40대인 그에게 결혼하신 줄 알았다며 20대 동료가 말하자 “그럼 나랑 결혼할래?”하며 경악스러운 말을 뱉었고,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막내 직원에게 실망한 눈빛으로 “사회생활 잘하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네? 있어도 없다고 해야지”라고 말하며 거짓말을 부추겼다. 그는 자리를 옮겨가며 술 권하는 걸 잊지 않았다. 직원들의 이름을 동생 부르듯,”ㅇㅇ아? 뭐하니? 술 마셔야지” 하며 회식 자리 술 문화를 강요했다.
회식 다음 날, 인사부장과 몇몇 남자 직원들은 연차 및 반차를 냈다. 여자 직원들끼리는 아무도 없는 화장실이나 단둘이 말할 기회가 생기면 지난날 회식 자리에서 자신이 보고 들었던 몇몇 남자 상사들의 경악스러웠던 모습을 이야기했다. 막내 여자 직원은 퇴근길 나를 불렀다. “언니 저는 신나게 놀았는데 그분 때문에 너무 싫었어요. 자꾸 제 허리 만지고 어깨에 손 올리니까 제가 노래방을 술래잡기하듯 뺑뺑 돌았거든요? 그나마 ㅇㅇ오빠가 못 오게 막아줬으니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고작 “그러니까 왜 그렇게 늦게까지 놀았어” 하며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지킨 그녀를 탓하는 말이거나 “미친놈들” 하며 들리지도 않을 욕을 그녀 대신 시원하게 해주는 일이었다. 2018년 초 JTBC에서 서지현 검사는 검찰 내 성폭행을 폭로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에서는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얼마 뒤 유튜버 양예원 씨를 스튜디오에서 성추행한 남자가 한강 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가해자의 목소리만 들리던 세상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도 점차 커져가고 있는데 2018년의 회식 문화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옴니버스 퇴사 에세이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에서 저자 안미영은 이렇게 말했다. "분명한 것은 말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조리함과 억울함을 묻어두고 그저 지난 일로 흘려보내면 내가 다시 겪진 않더라도 그 길을 밟는 다음 사람이 문제를 또다시 경험한다. 개선되지 않고 점차 망가지는 그곳은 크게 보면 곧 내가 속한 세계다. 부당한 일을 보고 겪었으면서 알리지 않고 그것이 유지되는 데 기여한다면 그녀의 말대로 적폐의 공범이란 오명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를 알릴 때는 괴롭고 부끄럽지만 마침내는 그 이상으로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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