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우파>를 통해 되돌아보는 경쟁의 의미
2021년 한 해, 가장 빠져지낸 프로그램이 있다면 단연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다.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 댄서들을 보는 즐거움과 그 화려함에 버금가는 댄스 실력, 자존심을 내건 경쟁 구도 등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소위 현생에서 만나면 무서운 '쎈 언니'들끼리 모여 '춤' 하나로 칼을 휘두르는 듯한 배틀 경쟁을 계속해서 돌려보고 싶게 만드는 건 어떤 발가락 꼬순내같은 중독성 때문이기도 했다.
프로그램 초반, '모니카' 쌤의 팬을 자처하는 주변 친구들이 많았다.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부드러운 여유와 몸짓, 큰 무대에도 쫄지 않고 팀원들을 이끄는 리더의 모습에서 모니카에게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당돌한 매력의 가비와 청순&예쁨의 결정체 노제, 재치 넘치는 카리스마의 아이키, LA 쎈언니같지만 반전 매력의 리헤이, 그리고 당돌한 매력의 리정 마지막으로 자기감정에 솔직한 효진초이까지 어느 하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의 리더들 덕분에 보는 내내 마음이 훈훈해졌다.
프로그램이 우승을 향해 점차 올라갈 땐 출중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매번 승리하지 못하는 '허니제이' 쌤을 응원하는 팬이 되어버렸다. 애교 넘치는 평소 말투와는 다르게, 무대에만 올라가면 돌변하는 강렬한 눈빛과 힙하고 섹시한 매력 모두를 갖춘 댄스 실력 등 반할 수밖에 없는 포인트가 많았다. 마지막 생방송 결승의 무대를 볼 때는 허니제이쌤이 이끄는 홀리뱅을 향해 응원 문자까지 보냈고, 마침내 우승을 거머쥐는 모습을 보면서 나 혼자 방구석에서 감격했다. 탄탄한 실력이 받쳐주는 한 머지않아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구나. 현실에서 보지 못하는 정의가 실현된 모습처럼 느껴져서인지 '홀리뱅'팀의 우승이 내 일처럼 느껴졌다.
프로그램이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아쉬웠다. 이젠 이렇게 멋진 언니들을 다시 볼 수 없는 건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을 달래고자 매회차 마음 졸이며 봤던 미션 영상이나 놓칠 수 없는 모먼트를 모아 놓은 클립 영상을 돌려보며 언니들의 매력을 곱씹고 곱씹었다. 공백도 잠시, 방송이 끝난 한 달여 동안 전국은 '스우파' 열풍에 빠졌다. 예능 프로그램 곳곳에선 스우파 리더들을 섭외해 그 뒷얘기를 다루는 가하면, 다시금 배틀 신을 연출하면서 지난 프로그램의 여운을 달랬다. 패션 매거진 곳곳에선 스우파의 리더들을 모아 화보와 영상을 찍어 SNS 곳곳을 도배했다. 스우파 전국 순회공연을 하는가 하면, 엠넷에서는 그 댄스 공연을 방송으로 내보내고, 차후 고등학생 크루들의 배틀을 건 <스걸파>까지 홍보하면서 스트릿 댄스가 수면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모두가 여성 댄서들의 매력에 빠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얼까. 고민해보면 그 댄서 신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 사회의 축소판 같기 때문이었다. 출중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애써야 하는 점이 그랬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음에도 승자는 한 명으로 정해하는 잔인한 토너먼트의 룰 때문에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이는 아쉬운 마음을 숨기고 박수를 치고 무대를 내려와야만 하는 게 경쟁이었다. 우리 시대에 경쟁은 산소 같은 것이었다. 나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은 너무도 많았고, 내 옆자리 앉은 친구는 나보다 예쁜데 실력은 뛰어났기에 비교와 평가는 머리카락처럼 태어날 때부터 함께했던 것만 같았다.
그런 불안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스우파>의 리더들은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탈락 위기 배틀을 앞두고는 치열하게 준비했고, 상대도 멋있게, 최선을 다하길 바랐다. 자신의 팀원이 워스트로 지목되더라도 아이키는 "우리 윤경이, 제가 본 것 중에 제일 섹시했습니다."라고 당차게 마이크를 쥐고 하고 싶은 말을 뱉어내기도 하고, 모니카는 탈락의 고배를 마시던 때도 "저희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라며 담담히 그 탈락을 실패로 새기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며칠 전 방영되어 논란이 된 여고생 댄스 서바이벌<스걸파> 내 스퀴드와 클루씨의 배틀은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미션은 두 팀이 서로의 일부 안무를 짜서 선물하면, 각 팀은 상대 팀이 짠 그 안무를 자신들의 퍼포먼스화 시켜서 K-POP 곡의 새로운 안무를 선보이는 것이었다. 두 팀 중 한 팀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미션 특성상 크루들은 다양한 작전을 펼쳤다. 우리 함께 멋있는 무대를 만들자며 서로 인정할만한 안무를 선물해준 팀이 있는가 하면, 교묘하게 밋밋한 안무를 주거나 혹은 따라 하지 못할 만한 기교를 넣어 상대 크루가 기술을 연마하는데 애를 먹게끔 술수를 쓰기도 했다.
클루씨 팀은 여기서 더 나아가 춤을 못 추는 내가 보기에도 멋없고, 기괴한 동작으로 상대 팀의 퍼포먼스에 찬물을 끼얹는 안무를 선물했다. 그러면서 안무를 자세하게 가르쳐주지 않으려 한다거나, 본인들도 할 때마다 달라지는, 완성도 떨어지는 안무를 상대팀에게 제대로 안 했다며 지적하는 모습이 방송에 적나라하게 비쳐졌다. 결국, 승부는 클루씨 팀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어딘가 찜찜한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이때 마이크를 쥔 모니카는 "경쟁이요, 앞서 나가는 건 맞는데요. 누군가의 발목을 잡고 올라가는 건 아니에요."라며 클루씨 크루와 그 멘토들에게 일침 했다. 이외에도 다른 크루들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고. 자기 실력으로 올라가자며 상황에 적확한 표현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방송을 보면서 불편했던 감정을 나만 느낀 건 아니었나 보다.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는 클루씨 팀을 비난하는 글로 가득 찼다. 그들의 SNS를 찾아가 악플을 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팀의 멘토들까지 당연하다는 듯 악플에 시달리는 듯했다. 여론은 셋으로 나뉘는 듯했는데, '클루씨가 잘못했다'이거나 '애들이 뭘 알겠냐' 이거나 '그들의 멘탈이 걱정된다'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였다. 아, 여기에 '이런 식으로 악마의 편집을 한 엠넷 놈들이 제일 나빴다'는 여론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이번 <스걸파>의 논란에 여론이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생각해보면 그 기저에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늘 경쟁의 상황에 놓인다. 유치원도 줄 서서 기다려 들어가야 하고, 대학에 입학하거나 취업할 때, 승진할 때도 우리는 늘 남보다 앞서야지만 '성공'이라고 불리는 성취를 얻어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성공은 오로지 본인의 실력 덕분이 아니라, 그 주변에 그의 성공을 위해 애써준 그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몰랐다. 우리 모두가 잘되는 것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남을 밝고 올라가도록 만든 시스템에 대한 소심한 복수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어쩌면 클루씨와 그들의 멘토 라치카가 그동안 <스우파>에서 보여주었던 선의의 경쟁, 댄서 신에 있는 우리 모두가 잘 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이라는 가치를 훼손한 건 아닐까. 현실에서는 그런 아름다운 경쟁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라도 보고 싶은 게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모니카의 발언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