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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긍정 Jul 09. 2021

여름휴가에 지리산으로 향하는 등산인이 되어 있었다

백무동에서 중산리로-지리산을 올랐다

5월 말, 나는 여름휴가가 간절했다. 주마다 한 촬영을 끝내고 나면 쉴 틈 없이 다음 촬영 일정이 잡혀있었다. 촬영 하나만 신경 쓰는 일도 벅찬데 3가지 주제의 촬영을 함께 돌리고 있노라면 이대로 나가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친구 상엽이에게 연차를 쓸 테니 한 달 뒤 지리산에 가자고 했다. 여행 계획이라도 세우면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리산이라면 괴롭고 힘든 마음에서 벗어나 리셋 버튼을 누른 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추진력이 좋은 상엽이 덕분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함께 떠날 의향이 있는 사람을 모아 카톡방을 만들었고 우리가 가게 될 코스를 정하고 버스와 방을 잡더니 어느덧 떠날 날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떠나기로 결심한 건 한 달 전이었는데 막상 실감이 나기 시작한 건 출발 당일 짐을 싸면서부터였다. 올라가서 마실 물과 간식을 넉넉히 챙기고 만약을 대비해 상비약과 레인커버, 호루라기까지 챙기고 나니 정말 이제 떠나는구나 하고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백무동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려고 11시 즈음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등산복 차림의 무리들이 눈에 띄었다. 함께 동행하기로 한 서연이와 주표, 상엽이었다. 표를 들고 승강장 앞에 섰을 땐 차를 타려는 등산객들로 가득한 승차장을 마주했다. 금요일 자정, 새벽을 달리는 버스를 타고 경상남도 백무동까지 향하는 사람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이, 그 자리에 내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리산에 간다니. 내 머리통 위로 솟아오른 60리터 배낭을 메고 정말 가는구나. 그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버스에서 과연 잠을 청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도 잠시. 흘린 침을 남몰래 닦으며 비몽사몽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어느새 지리산 백무동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사위는 고요했고 캄캄했다. 싱긋한 풀 내음만 우릴 반겼다. 등산객들은 일사불란하게 짐을 챙기고 화장실을 들렀다가 떠날 채비를 마쳤다. 우리도 그들 따라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가방과 신발을 조여매고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은 오전 4시 15분을 지나고 있었다.


생애 처음 렌턴을 모자 위에 고정시키고 얼마 전 주문한 등산 스틱을 손목에 쥐니 몇 걸음 안 걸었는데도 힘이 들었다. 힘이 든 이유가 가방의 무게 때문인지 낯선 공기 때문인지 눈앞이 캄캄해서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늘 오전 9시 무렵 만나 서울 근교 등산만 해보다가 높기로 유명한 지리산에 와 낯선 장비를 머리맡에 이고 쥐니 마음과 발과 손이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얼마 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호흡이 가빠졌다. 빈 속으로 하는 새벽 산행이라 그런지 더욱 힘이 빠지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오르던 길을 멈추고 계단 모퉁이에 짐을 내려놓고 아침을 먹기로 했다.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내려온 커피를 나눠 마시고 당을 충전할 수 있는 간식을 먼저 나눠가졌다. 상엽이가 가져온 양갱을 한입 베어 물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발열팩으로 데운 비빔밥으로 배를 채우고 기운을 차렸다. 밥을 먹고 나니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쪼그려 먹은 짐을 정리하는데 중년의 등산 동호회 회원들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 왔다. 몇 시에 출발했길래 지금 밥을 먹냐고, 어린 친구들이 대단하다고, 응원의 말을 나누고 조금 이따 보자며 인사를 나눴다.


상엽이가 구워온 치즈케이크

동갑내기 친구들이 모여서인지 대화의 주제는 자유롭게 흘렀다. 상엽이와 나는 대학 동아리 친구였고, 서연이는 상엽이가 2년 전 이탈리아 여행 중 만난 친구, 주표는 서연이의 전 직장 동료였다. 만날 일 없는 인연이 지리산 등산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서로에 대해 깊이 모르는 우리는 여러 질문을 나누며 서로를 알아갔다. 음식을 먹으면서 자연스레 채식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상엽이가 직접 만든 치즈케이크를 먹으며 상엽이의 취미인 베이킹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 꿈은 무엇인지, 모든 부가 충족되었을 때 무얼 하고 싶은지, 왜 등산에 중독된 것 같은지, 요즘 주식 시장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등 먹고사는데 중요한 질문과 전혀 쓸모없는 질문을 오고 갔다. 나는 지리산 등산에 꼭 어울리는 책 <아무튼, 산>에 대해서 소개해주다가 친구들이 최근엔 읽은 책이 없다며 의기소침해하면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이 뭐였냐고, 왜 기억에 남았는지 궁금하다며 대화의 끈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각자 인상 깊었던 이야기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너 그거 봤어?”에서 그거는 책을 뜻할 때도 있었고 영화를 뜻할 때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줄거리를 나누며 정상을 향해 걸었다. 힘이 들 때면 모두의 말소리가 줄어들었지만, 평지에 접어들 때면 이야기는 다시금 시작됐다.

여름의 지리산


마침내 첫 번째 체크포인트, 장터목대피소에 올랐을 때 사위는 밝았고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사람들은 테이블 곳곳에 자리를 잡고 고기를 굽는가 하면 버너에 끓인 라면 같이 뜨끈한 국물 요리를 먹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미리 대피소에 도착한 중년 산악회 무리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잠시 이리 와보라며 부르기에 다가가니 포일에 감싸 온 참외 하나를 나눠주셨다. 참외와 오이와 방울토마토, 커피를 나눠 먹으며 기운을 충전했다. 5시간 이어진 산행에 딱딱하게 굳은 허리를 펴기 위해 간단히 <이보영의 요가 수업>을 열었다. 내가 그동안 배워온 요가 동작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대피소에서 내려다보는 산 아래 풍경을 마주하며 뭉친 어깨와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 정상이 가까워지고 있는 듯한 주변 모습에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높게 솟아오른 나무와 돌들, 먼발치에 까마득하게 작아진 마을이 보였다. 참 많이 올라왔구나 새삼 느껴졌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몇 차례 몰아쉬고 나니 정상이 코앞에 다가왔다. 1915미터 정상엔 인증샷을 찍으려는 인파와 이름 모를 벌레떼가 득시글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이렇게 높은 곳이라면 인증샷을 외면할 수 없어 우리도 아픈 발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줄을 섰다.


내려오는 길이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지만 잠깐씩 쉬다 걷다를 반복하며 내려왔다. 기운이 점차 빠져서 그런지 하산하는 길이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하산길의 3분의 2 정도 내려왔을까. 절과 산악구조대 사무실 그리고 화장실이 보였다. 4시에 중산리 탐방 센터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가까스로 잡아탔을 땐 여행의 즐거움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아찔함과 기분 좋은 설렘 같은 기분이었다.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고소한 파전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우리는 가방을 푸르고 파전과 더덕구이, 산채비빔밥을 시켜 나눠먹었다. 힘든 상행을 마무리하고 먹는 저녁은 다른 어느 밥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중산리 탐방로에 있던 식당에서의 식사

식당에는 우릴 처음부터 반기던 중년의 등산객 무리가 미리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메뉴 주문을 하고 멍을 때리고 있는데 여러 등산객들이 우리를 보며 “어머! 벌써 내려왔구나! 역시 젊어서 그런지 빠르네~”하며 반갑다며 인사를 건네 왔다. 조금 뒤엔 앞자리에 앉은 여러 무리가 반갑다며 크게 손을 흔들길래 다른 사람들하고 우리를 착각한 게 아닐까? 하며 뒤를 돌아보았는데 분명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너네가 맞다며 “우리 대피소에서 만났잖아!” 하며 반가워했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은 듯한 반가운 얼굴에 내가 모르는 먼 친척 어른들을 만난 기분이었다.

지리산 등반 준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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