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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지라르
Nov 26. 2023
롤리타 해석
책임없는 쾌락
스포 넘치고, 비전문적인 해석난무 주의
초간단 줄거리
소아성애자 험버트가
어린 소녀 롤리타를 사랑하며
자기합리적 변명을 오지게 담은
불쾌파티 소설
소아성범죄자와 소아성애자
제가 이해하는 소아성범죄자는
아이에게만 욕정을 품는 것이 아니라
성인에게 욕구를 해소 할 수 없어서
아이에게 욕구를 푸는 정도였습니다
성인여성에 관심을 받지 못한다거나,
반대로 억압된 환경에 놓이면
만만한 아이들이 타겟이 되는 거죠.
이들은 거절을 못하여 좋게 보면 착하고,
나쁘게 보면 순종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이
‘저 사람은 그럴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말하기 쉽습니다.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면 경계라도 하겠는데
착해보여서 경계조차 어렵기에
나이가 어릴 수록,
인간에 대한 나쁜 군상을 파악하기 힘들 수록
더 쉽게 당할 수 있습니다.
책의 주인공 험버트는 소아성애자입니다.
성인이 아니라 어린 아이만 원한다는 점에서
보통의 소아성범죄자와는 다르다는게 내 생각이고,
이점이 소아성애자와 소아성범죄자의
약간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험버트가 어린 소녀만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이 글의 후반에 좀 더 다뤄보겠습니다.
모호한 법과 잣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험버트
20살은 되지만 19살은 안 되는 게 말이 될까요?
나이는 겨우 한 살차이일 뿐인데
법적으로 성인과 청소년의 구분이 범죄와 사랑을 구별하게 하는 걸까요?
롤리타가 먼저 유혹할 때가 있었고
그래서 험버트는 오히려 피해자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독자는 불쾌하지만
쉽게 반박할 수가 없는 모순이라
당황한 채로 책을 읽게 됩니다.
바로 이점이 험버트가 노리는 부분이죠
제가 생각했을때 험버트의 죄는 명확했기 때문에
험버트의 개소리에도 당황스럽지는 않았습니다.
험버트의 죄는
어린 소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린 소녀를 좋아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설사 아이에게 야릇한 감정을 갖더라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피합니다
양심이 있고,
일을 저질렀을때 돌아오는 죄책감의 무게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험버트는 양심이 없었죠
‘양심때문에 욕구를 자제하며 살아야 하는걸까?
법으로 심판하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많잖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양심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험버트의 논리에 무너지기 쉬운
힘없는 양심이라도
지키더라도 세상이 바뀌지 않을
무력한 양심이라도
무거운 책임과 죄책감 때문에
원망스러운 양심이라도
반드시 지켜야할 때는 지켜야 하는 것!
미성년 기준이 애매하다는 둥
롤리타가 먼저 유혹했다는 둥
개소리를 떠들어되지만
소아성애자의 문제가 아니라
강도 또는 살인자가 되더라도,
양심이 없이 행한 것이고
죄책감이 없어
아주 번지르르한 쌉소리로
똑같이 변명하려 들거라 봅니다
양심과 죄책감이 없는 인간에게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어떠한 상황이 주어진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안봐도 비디오이지 않을까 합니다
험버트의 사랑은 정말 순수한 사랑일까?
나르시시스트는 나르키소스가 연못에 비친 자신을 사랑해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의 성향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자신을 사랑했다기보다
연못에 비친 ‘아름다워보이는 자신’을 사랑 생긴 정신병입니다.
내가 멋져 보여하는 나르시시스트 성향은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 있기는 하지만
험버트는 그 정도가 상당한 편입니다.
‘나는 괜찮아 보여야해’
‘아름다워보여야해’
‘추해서는 안돼’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보여야 해서
온갖 포장지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나르시시스트입니다.
험버트의 나르시시스트 성향은
어린 여자에게 욕정을 품은 것에
죄책감을 가지면 내가 잘못되어 버리기 때문에
소녀를 고귀한 사랑의 대상화로 만들어
‘어린 여자만 찾는 성향’이 되버린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사랑보다 소녀에 대한
대상화, 우상화에 가까운 거겠죠
이렇게 생각하니 아이히만이 떠오릅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이
죽은 유대인의 시체를 보고
불쾌함과 죄책감을 가지는 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책감을 외면하고
유대인 학살이 위대한 일이라고
우상화를 하고 유대인 학살을 강행합니다.
이처럼 양심을 외면하고
죄책감을 가지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는 사람이라서,
그리고 멋져보여야하는 인간이라서
소아성애자가 되버린게 아닐까?가
험버트 성향에 대한 저의 해석입니다
허무한 결말
험버트는 경찰에 잡혀가도 반항하지 않습니다
반항하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고
잘못은 추한거니까요.
"기다리고 있었다"
"걱정마라 도망가지 않으니 내 발로 가겠다"
이렇게 말해야
누군가의 억압 또는 커다란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이히만도 모사드에 잡힐때
저항하기 보다 '올 줄 알았다'고 말한 이유도 그렇습니다.
무섭더라도 간지를 보여줘야했죠
N번방 사건의 조주빈 또한 취재진의 질문에
'악마의 삶을 멈춰주신데 감사하다'라고 뜬금없는 답을 합니다
어떠한 반성의 말도 없이
악마라는 초월적 존재로 자신의 비유하고
자신이 오히려 잡혀서 다행이라는 표현인데
이 또한 자신이 멋져보이고 싶은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일 수 있습니다.
험버트가 경찰에 잡혀가는 것을 보고
독자는 허무한 결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허무한 반응은 나르시시스트가 원하는 반응입니다
결국 처벌을 받더라도
찌질하거나 나쁘다고 욕먹지는 않으니까요.
험버트의 살인, 퀼티의 죽음
롤리타가 험버트는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은 퀼티였다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사랑은
순수하고 고결해야 했는데,
유일하게 이 생각을 무너트릴 수 있었던 롤리타가
험버트의 사랑이 결코 고결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였죠.
결국 험버트는 무너집니다.
나름 괜찮은 사람을 연기했던 험버트에게 살인은
선을 넘어 버리는 행동이였지만
그만큼 무너진 험버트의 사랑은
충분히 험버트를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이 분노는 롤리타에 대한 분노도
퀼티에 대한 분노도 아니였습니다
추한 자신에 대한 분노였죠.
자기반성으로 이어지지는 않은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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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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