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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Jan 14. 2021

9개 구단의 영웅이 된 히어로즈

김상수로 알아보는 영웅군단의 현주소 - 2편

1편 - 히어로즈는 2차 4라운더를 얼마나 잘 뽑았을까?


  「행복한 왕자」라는 제목의 1888년 작 동화가 있다. 살아생전에 부유하게 살았던 왕자님이 있었는데, 생을 마감한 뒤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동상이 되어 마을 광장을 내려다보니 가난하고 힘든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에 왕자는 제비에게 부탁해 자신이 몸에 두른 금은보화를 불우한 백성들에게 나눠준다. 마침내 모든 보물을 선물하고 볼품없어진 왕자의 동상은, 자신이 도움을 준 이들의 손에 의해 철거된다.

  그로부터 133년 후인 2021년. KBO리그에는 내부 육성만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구멍으로 고민하는 팀에게 꼭 필요한 선수를 내주는 구단이 있다. 행복한 왕자 동상과는 달리 집안 사정이 유복한 것도 아니고, 이타심에서 우러나오는 길 터주기식 이적도 아니다. 구단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하나둘 떠나가면서, 지켜보는 이들의 팬심도 떠나가고 있다.



#. 경쟁팀 약점 메워주는 영웅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불펜 평균자책점 최하위에 머문 경쟁팀에게, 내구성 강한 30대 초반의 불펜 투수를, 보상 선수도 보상금 9억도 받지 않고 내줬다. 어디 이뿐인가? 1루수가 급한 팀에게는 1루수를, 3루에 구멍이 뚫린 팀에는 3루수를 퍼다 준다. 그야말로 '영웅'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살신성인의 자세다.


  2020시즌, SK 와이번스는 산체스와 김광현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과부하가 걸린 불펜진이 무너지는 등 모든 불안 요소가 한꺼번에 폭발하며 정규시즌 9위의 굴욕을 맛봤다. 타선은 그래도 나아질 여지가 보인다. 득점 생산력은 떨어질지언정 팀 홈런 4위(149개)를 기록하며 장타 생산력은 건재함을 보였다. 최정과 로맥이 굳건히 중심타선을 지켜주고 있다. 한동민은 부상만 없다면 제 몫을 할 수 있는 타자다. 김강민의 뒤를 이을 차기 주전 중견수 최지훈을 찾았다. 트레이드로 영입한 오태곤이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다만 불펜진의 문제는 2021시즌이 개막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투수 전향 1년 차에 혹사당한 여파로 어깨 부상을 입은 하재훈은 언제 복귀할 수 있을지 모른다. 20시즌에 팀 내 구원 투수 중 가장 높은 WAR(Wins Above Replacement, 대체 수준 대비 승리 기여도)를 기록한 박민호는 손목 수술로, 이탈했다. 김정빈은 선발 투수로 전향했다. 서진용이 마무리를, 김태훈과 이태양이 필승조 역할을 맡을 예정이지만 직전 시즌 각각 7점대, 5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만큼 불안 요소가 크다.

  김상수의 영입은 이러한 상황을 해소해줄 블루칩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1점대를 찍는 특급 불펜은 아니지만, 지난 5년간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은 홀드(95개)를 쌓으며 프라이머리 셋업맨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했다. 유사시 임시 마무리가 가능한 멘탈을 가졌다는 점 또한 강점이다(김상수 2017~2018년 2시즌 동안 23홀드 33세이브 기록). 5년 연속으로 50경기 이상 출장하며 50이닝 이상을 소화한 철완이다.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부상 이력자가 많은 SK가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필승조치고 다소 높은 방어율 또한 SK를 상대하지 않으면 대폭 하락한다(지난 2년간 SK 상대 평균자책점 8.10). 그야말로 비룡군단 맞춤 투수다. 키움은 이런 김상수를 사인 앤 트레이드로 내줬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히어로즈가 '사인 앤 트레이드로 상대 팀의 전력 누수 문제를 저렴한 가격에 해결해준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8년 겨울 당시의 LG 트윈스는 심각한 내야진 부실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2010년대 초중반 내야의 기둥 역할을 해줬던 정성훈과 손주인이 노후화됐는데, 그들의 뒤를 이을 선수가 준비되지 않았다. 3루 포지션 문제는 매년 외인으로 메꾸려 했으나, '잠실에서 통할 장타력의' '건강한' '코너 내야수'를 영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년 20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3루수 양석환마저 군 입대했다. 모기업은 외부 영입에 거액을 투자할 의지가 없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무룩해 했을 류중일 감독을 활짝 웃게 해줬던 것이 바로 키움 구단이었다. 보상선수와 10억 원 상당의 보상금을 포기하고, 5억 원만 받고서 같은 연고지 경쟁팀의 취약 포지션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다.

  영입 효과는 확실했다. 김민성은 잔 부상 등으로 키움 시절만큼의 퍼포먼스를 펼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포지션 붕괴는 막으며 양석환이 돌아오기 전까지 스탑갭 역할을 해줬다. 올 시즌부터는 양석환과 함께 체력을 안배해가며 출장해 더 좋은 활약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LG가 외국인 타자를 영입할 때 더 이상 3루에 신경 쓰지 않고 1루 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로베르토 라모스라는 괴물 타자를 품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이대호가 노쇠화로 1루 수비를 보기 어려워지자 곤란해하던 롯데 자이언츠에게는 채태인을 선물했다(박성민+2억).

  사인 앤 트레이드는 아니지만, 2019시즌 종료 후 이보근을 40인 보호명단에서 제외하며 kt 위즈에 보내기도 했다. 검정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이보근은 지난해 49경기에 출장해 46.2이닝을 소화하는 동안 9홀드 6세이브를 올리고 2.5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팀의 창단 첫 플레이오프 진출에 기여했다. 한편 이보근보다 높은 승리 기여도를 쌓은 키움의 불펜 투수는 양현과 조상우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적한 선수들은 새로운 팀에서 아쉽지 않은 활약을 펼쳤고, 영웅들을 품은 팀들도 저렴한 가격에 복덩이를 얻었으니 기뻤고, 모두가 만족하며 행복해했다. 더 말할 나위 없는 해피 엔딩이다!

  이 모든 일에 키움의 '사인 앤 트레이드'로 선수 퍼주기가 있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 타인의 행복 이면에 남은 영웅들의 빈자리

김민성을 보낼 때도 나름의 계획은 있었다.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김민성을 '떠밀다시피' LG로 보낸 키움 구단에는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다. 김민성 외에도 풀타임 주전 3루수로 키우고픈 선수들이 차고 넘쳤다. 이를테면 238타석밖에 소화하지 않았음에도 7개의 홈런을 쳐내고 김민성과 같은 타점을 쌓아 올렸던 송성문이라든가, 한때 차세대 주전 1루수로서 촉망받았던 장영석이라든가, 김민성의 뒤를 잇게 할 생각으로 지명했고 이제는 군 복무까지 마치고 돌아온 임지열이라든가 하는 선수들 말이다. 2019년 하반기가 되면 김웅빈도 전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을 것만 같았던 김민성의 빈자리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시즌 시작 전부터 음주운전으로 단추를 잘못 꿴 임지열은, 1군에 콜업될 때마다 초조함이 묻어나오는 플레이를 펼치며 감독의 신임을 사지 못했다. 송성문은 스프레이 히터로 스타일 변화를 꾀했다가 이도 저도 아닌 1년을 보낸 뒤 입대했다. 장영석은 전례 없는 파격적인 기회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오롯이 드러낸 뒤 트레이드되었다. 김웅빈은 사실상 '3루 불가' 판정을 받고 1루수로 전업했다.

  플랜 A부터 플랜 Z까지 몽땅 실패해버린 키움은, 코너 내야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메꾸기 위해 새로운 외국인 타자로 테일러 모터를 영입했다. 롯데 자이언츠에 외야 유망주 추재현을 내주고 전병우를 받아오는 트레이드 또한 감행했다. 모터는 10경기에서 35타수 4안타라는 초라한 성적만을 거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병우는 딱 기대치만큼의 성적을 올렸으나 부상으로 80경기 출장에 그친 김민성보다 저조한 수치였다(전병우 2020시즌 WAR 0.74, 김민성 2020시즌 WAR 0.97).

  지난 2년 동안은 김하성이 틈틈이 3루수 겸업을 했기 때문에 구멍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작년을 끝으로 김하성도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다. 김민성의 그림자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되었다. 군 문제 해결할 시간이...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다시 김상수 이야기로 돌아가자. 김치현 단장은 김상수의 사인 안 트레이드에 대해 "있다면 '플러스' 요인이 되겠지만 팀과 선수가 생각하는 퍼포먼스의 가치가 달랐다"며 "김상수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부상이 있었던 안우진이 건강하게 2021시즌을 준비한다. 그리고 장재영이 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장재영을 정말 '올해부터 1군에서 기용 가능한 플러스 요소'로 보고 있다면, 이는 김민성을 보냈던 2019년의 초봄 때보다 더욱 당혹스러운 낙관이다. 애초에 신인에게 1년 차부터 1군에서 밥값을 하길 바라는 것처럼 성급한 생각도 없을뿐더러, '불펜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 강속구 유망주를 불펜에서 소모하는 행위 또한 바람직한 육성 방법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김상수가 맡았던 역할을 누구에게 기대하는지 또한 궁금하다. 올 시즌 키움의 불펜진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준 선수들이 많았지만, '불펜투수로서' 준수한 활약을 펼치는 것과 '필승조로서'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가장 큰 걱정이 되는 것은 2021시즌이 끝난 이후다. 코로나19가 연말까지 안정세에 접어들지 못해 도쿄올림픽이 개최되지 않는다면, 주전 마무리 조상우가 군 입대로 전력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 그날이 오면, 셋업맨과 마무리 보직을 전부 맡을 수 있는 김상수가 없는 현 상황에서, 2022년의 셋업맨과 마무리 투수는 김태훈과 이영준, 그리고 안우진이다.




#. 그래서 영웅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프렌차이즈 스타의 잔류에 아무런 의지도 보이지 않는 작금의 모습은 10년 전 '넥센 마켓'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미지 : '에쿠갑' 넥센 마켓 만화서 발췌)

  남은 것은 상처뿐이었던 2015년의 한국 시리즈가 끝나고서부터 수많은 '넥벤저스'의 영웅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중심타선을 이끌었던 유한준이 kt로, 영원히 목동의 뒷문을 잠가줄 것 같았던 손승락이 롯데로 떠났다. 둘을 보내고 이택근과 재계약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팬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두 선수는 확실히 히어로즈 구단의 지갑 사정으로는 잔류시키기 어려웠으니까.

  남은 것은 상처뿐인 2020시즌이 끝났다. 김상수가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 분명 주장으로서 다년간 선수단을 이끌었고 팀 사정이 어려울 때 분투하는 등 2010년대 후반의 히어로즈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지만, 유한준과 손승락만큼 활약했던 선수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팬들이 이렇게 허탈해하는 이유는, 구단에서 김상수를 잡을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엿한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한 선수에게 너 하나쯤 없어도 괜찮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오히려 다른 팀으로 이적하도록 '사인 앤 트레이드'라는 방법으로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다.


  KBO리그에서의 '사인 앤 트레이드'는 FA 자격을 얻은 선수의 가치가 애매해 보상금과 보상 선수에 덜미를 잡힐 때, 원만하게 이적하게끔 해주는 인도적인 제도이다. 그러나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다년간 팀에서 뛰어온 선수를 적극적으로 내보내는 키움의 모습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이적을 돕는다'기보다는 11년 전 넥센 마켓을 열었을 때의 모습과 더욱 닮아 보인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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