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KBO리그 초창기를 호령했던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이 2년 연속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던 시절의 일이다. 당시 선동열은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지만, 빨라도 8회 즈음에 등판하는 오늘날의 전업 마무리와는 달랐다. 팀이 필요로 하면 언제든 불펜에서 몸을 풀었고, 마운드에 올라왔다. 1987년에는 부상으로 전년도보다 적은 경기에 나왔음에도 선발투수로 11경기, 불펜으로 20경기에 나서, 162이닝을 소화하며 0.8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정규시즌 경기수가 108경기에 불과하던 시절이니, 오늘날로 치면 216이닝을 소화하는 0점대 불펜인 셈이다.
옆나라 일본에서 활약하다 건너 온 황혼기의 선수들이 MVP급 성적을 올리던 리그였다. 실력도 기술도 부족했던 당시의 선수들에게는 선동열의 150km/h 강속구와 140km/h대 슬라이더를 정공법으로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타자들도 울상이었지만, 더 곤란한 이들은 해태 타이거즈와 맞붙는 선발 투수들이었다. 기껏해야 1년에 서른 경기 정도 나서는데, 선동열을 만나면 아무리 잘 던져도 패전투수가 될 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MBC 청룡의 에이스였던 정삼흠이 고안해낸 파훼법은 '자살 폭탄주 작전'이었다. 피차 멀쩡한 상태로 던지면 1패를 적립할 게 눈에 선하니, 경기 전날 함께 술판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선동열로서는 고려대 입학 동기인 데다가 시즌 도중에 만날 일이 없는 친구이기에, 도저히 정삼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정삼흠에게는 계획이 다 있었다. 술자리에 나가기 전 저녁을 든든히 먹고 화장실에서 틈틈이 술을 뱉어내는 등의 노력으로 컨디션을 조절했다. 새벽 다섯 시까지 양주 네 병에 맥주 수십 병을 마셨다. 약 13시간 후 벌어진 야간 경기에서 정삼흠은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다. 그러나 선동열이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으면서 결국 해태의 5-0 승리로 끝났다.
선동열이 KBO리그에서 활약했던 1990년대 초반에는 경기 중 중국집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먹는 선수들도 있었다. 선동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하루는 전날 숙취가 미처 안 풀려 경기 중 짬뽕 한 그릇을 시켜 먹었다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등판해, 그만 블론 세이브를 저지른 적도 있었다.
사례 2. 롯데 자이언츠와 두산 베어스, 그리고 NC 다이노스에서 활약했던 최준석은 은퇴 전까지 KBO리그 최고중량 선수로 유명했다. 프로필상으로는 100kg 초반대였지만, 그가 '겨우' 100kg대일 것이라고 믿는 팬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최준석도 신인 시절에는 살집 없이 탄탄한 체구를 자랑하는 선수였다. 180cm 후반의 장신에 기골이 장대하기에 슬림한 체형은 아니었지만, 위의 사진을 통해 알아볼 수 있듯 날렵한 턱선이 살아 있는 선수였다. 100m를 12초대에 끊는 호타준족형 포수였다.
그러나 이대호와 같이 자취를 하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체구를 갖게 되었다. 매일 밤마다 덩치에 걸맞는 양의 야식을 시켜 먹으면서 수십 킬로그램의 살집이 붙어버린 것이다. 최준석은 2012년에 방영되었던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신들이 한 번 야식을 시키면 중국집 사장님이 잔치가 벌어진 줄 오해했다고 말했다. 짜장면과 짬뽕 곱배기는 기본이고, 탕수육과 볶음밥 대자까지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두 선수의 사례 외에도, KBO리그 선수가 야식으로써 균형 잡힌 체격을 잃고 펑퍼짐한 몸매를 갖게 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인 시절 98kg의 몸무게였던 류현진은 김태균과 함께 숙소 룸메이트로 지내는 과정에서 120kg 언저리까지 살이 찐 적이 있다. 이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아, 그가 '류뚱', 'C컵 좌완' 같은 별명을 얻게끔 했다. 류현진과 같이 야식을 먹었던 김태균 또한 몰라보게 살이 불어난 것은 마찬가지였다. 2010년 지바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할 당시 "스프링캠프 시작 전까지 5kg을 감량하겠다"라고 밝히자 <산케이 스포츠>에서 '크게 부풀어 오른 배를 어루만지며 다이어트를 결의했다'고 묘사할 정도였다.
사례 3. 201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kt 위즈의 1차 지명을 받았던 박세웅은 입단 당시부터 초특급 유망주였다. 데뷔 시즌에는 퓨처스리그에서 풀타임 선발투수로 활약하며 북부리그 다승·탈삼진 1위, 평균자책점 4위를 기록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인이라고 믿을 수 없는 호성적이었다. 이듬해에는 구단의 기대를 받으며 꾸준히 선발 기회를 받았고, 시즌 중 롯데가 포수 유망주 장성우를 내주며 트레이드로 영입하기도 했다.
롯데 팬들 입장에서는 '안경 쓴 우완 신예'라는 점에서 최동원과 염종석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응원받기도 했다. 당시 롯데 1군 투수코치였던 염종석은 "저 나이에 구속과 제구를 동시에 갖춘 선수는 없다"며 박세웅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못했다. 그런 박세웅의 유이한 약점은 자신감과 몸무게였다. 자신감은 경험이 쌓이면 해결될 문제였다. 체중은 구단의 체계적인 관리 하에서 차차 늘려나가면 됐다. 그런데 롯데 구단이 박세웅의 체중을 증량하기 위해 내린 지시는 "매일 밤 치킨 한 마리에 콜라를 마시고 자라"는 것이었다.
이 또한 비단 박세웅만의 일은 아니다. 두산에서 활약했던 조승수는 191cm가 넘는 장신임에도 몸무게가 70kg대에 불과할 정도로 호리호리한 체구를 갖고 있었다. 구단에서는 그를 살찌우기 위해 갖가지 기름진 야식을 제공했다. 최준석을 숙소 룸메이트로 배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때 삼성 라이온즈의 불펜 에이스로 활약했던 안지만도 입단 당시에는 8개 구단 최경량 투수였다. 몸무게를 늘리기 위해 매일 밤마다 치킨 한 마리와 라면 두 그릇을 먹었다.
경기 전날 새벽까지 술판을 벌이다 경기에 임했던 선수들. 식습관 불량 등 자기 관리에 실패했음에도 재능으로 커버하던 스타 플레이어들. 그리고 몸을 만들어야 한다며 응급실에 실려갈 때까지 야식을 목구멍 뒤로 밀어넣었던 신인들. 모두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KBO리그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광경이다. 그땐 그랬다. 그래도 됐으니까. 그렇게 해도 야구가 됐으니까.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KBO리그 역시 발전했다. 초창기 프로야구계를 폭격했던 선동열의 신체 조건(184cm, 97kg)이 등록 선수 평균 신장(183cm, 87.5kg)을 겨우 넘기는 시대가 왔다. 제아무리 150km/h대 강속구를 던질 줄 안다고 해서, 남다른 운동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데뷔하자마자 리그를 정복할 수는 없다. 나쁜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선수들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올시즌 전병우와 함께 키움 히어로즈의 주전 3루수 자리를 놓고 경쟁중인 김웅빈은, 작년까지만 해도 사실상 '3루 불가' 판정을 받았다. 입단 당시에만 해도 '포스트 최정'으로 기대 받았으며 군입대 직전이었던 2017시즌에도 2루수로 많은 경기에 나섰던 그였다. 하지만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김웅빈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도저히 1루 외 다른 포지션에서 기용할 만한 수비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역 직후 1군에 합류했던 2019시즌에는 3루수로 출장한 한국시리즈에서 어이없는 실책을 보여주며,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2020시즌에는 1루수로서 53경기에 출장해 381.1이닝을 소화하는 동안 3루수로서는 8경기 35이닝에 그쳤다. 3루수로서 완전히 신뢰를 잃었음을 보여준 기록이다. 2021시즌을 앞두고도 1루 자원으로 분류 되었기에, 외국인 타자로 1루&지명타자 자원인 데이비드 프레이타스를 영입했을 때는 그의 거취에 대한 우려도 많았다.
그런 김웅빈이 개막을 앞두고 다시 3루로 돌아갔다. 제아무리 1루가 포화 상태라고 해도 그의 수비력이 작년과 같다면 불가능한 선택이다. 하지만 김웅빈은 공수 양면에서 발전한 모습을 보이며 문제 없이 시즌을 준비 중이다. 비결은 바로 '야식 끊기'다.
김웅빈은 프로 데뷔 당시에만 해도 80kg 초반대의 체중에 머물렀다. 그런데 매일 밤 야식을 즐겨먹으면서 몸무게가 20kg이나 늘었다. 힘은 붙었을지 몰라도 순발력까지 떨어졌다. 체중 감량을 위해 야식을 끊었다. 몸이 가벼워지면서 스윙 스피드는 물론 수비에서의 움직임까지 더 좋아졌다. 얼마 전 구단 자체 청백전에서는 투런포도 쏘아올렸다.
일본 프로야구계의 레전드 스즈키 이치로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규칙을 정해 놓고 이를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었다. ① 경기 시작 5시간 전에는 경기장에 들어가, 같은 방식으로 스트레칭과 타격 준비를 한다. ②더그아웃에 있을 때는 1인치 나무 막대기로 발바닥을 문지른다. 발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③ 집에서 텔레비전을 볼 때는 시력 유지를 위해 선글라스를 낀다. 그는 "나와의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자신한다.
식습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MLB에 진출한 뒤 7년간 매일 아침으로 카레만을 먹었다. 부인이 직접 만들어준 갓 조리한 카레여야만 했다. 돈가스 카레, 가라아게동 카레 같은 '변칙 메뉴'는 허용되지 않았다. 물론 매일 아침 카레를 먹는 식습관이 건강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이치로에게 있어서 변수를 억제하기 위한 루틴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매일 집에서 카레를 먹음으로써, 경기 직전 짬뽕을 먹다가 급하게 타석에 선다든가 아침을 먹지 못해 더그아웃에서 오예스 같은 것을 먹는다든가 하는 상황을 막은 것은 맞다.
유한준은 '건강한 식습관'을 루틴으로 삼고 있는 프로야구 선수의 훌륭한 사례이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30대 중반의 나이에 FA 계약을 맺었음에도 별다른 에이징 커브 없이 꾸준한 성적을 냈다. 지난 시즌에도 100경기 이상 출전하며 7년 연속으로 세자릿수 안타와 두자릿수 홈런을 쳐냈다. 이는 그가 여전히 프로 선수로 뛸 수 있는 신체를 유지 중임을 보여준다.
유한준은 이러한 몸상태를 이어가기 위해, 시즌 중 생선회나 초밥 같은 날 음식을 손에 대지 않는다. 자극적이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는다. 그의 봄·여름·가을 가족 외식 메뉴는 무조건 스테이크다. 술·담배를 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커피나 탄산음료도 마시지 않는다. 박병호가 "한준이 형이 진짜 열 받으면 콜라를 한 잔 마신다. 그러면 후배들이 '괜찮으시냐'고 말을 건넸을 정도"라고 인터뷰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롯데 자이언츠의 손아섭 또한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는다. 과거 KBO리그에서 활약하기도 했던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령 홈런 기록 보유자' 훌리오 프랑코의 철저한 자기 관리를 보고 감명받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코는 탄산음료를 입에 대지 않음은 물론, 매일 일곱 끼의 단백질 위주 식사를 하며 56세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위에서 이야기한 유한준과 프랑코, 손아섭 같은 선수들은 모두 육류 위주의 식사를 해왔다. 이치로는 채소를 싫어했다. 평균 운동량이 일반인에 비해 월등히 많고 경기에서 최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하는 선수들에게,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요법은 당연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해 노경은은 여타 KBO리그 선수들과는 다른 식이요법을 택했다. 돼지, 소, 닭고기는 물론 생선까지 먹지 않고 콩고기 등으로만 필수 단백질을 섭취하는 '채식주의자'가 된 것이다.
시작은 재작년 11월 강영식 투수코치가 보내준 채식 관련 다큐멘터리 영상을 접하면서부터였다. 해당 영상에서는 채식을 하면 부상 회복이 빠르고, 나이 많은 선수들이 체력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2020시즌이 시작될 즈음이면 노경은은 만 나이로 서른 여섯이 되었다. 팀에서는 노경은을 선발투수로 기용하기를 바랐지만, 역대 KBO리그에서 만 36세 이상의 한국인 투수가 130이닝 이상을 소화한 사례는 단 11번밖에 없었다(96·97·98 김용수, 01 한용덕, 02·04·06·08 송진우, 17·19 윤성환, 17 송승준). 더군다나 노경은은 소속팀과의 FA 갈등으로 인해 2019년을 통으로 쉰 상황이었다. 1년의 실전 공백을 안은 노장에게는 변화가 필요했다. 노경은은 달걀, 우유 등 동물성 식품까지만을 섭취하는 '락토 오보 베지테리언(lacto-ovo-vegeterian)'이 되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지난 시즌 25경기에 출장해 133이닝을 소화하며 4.8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롯데 소속 투수들 중 세 번째로 많은 이닝을 소화했고, 네 번째로 높은 WAR(Wins Above Replacement, 대체 수준 대비 승리 기여도)를 기록했다. 한 마디로 그는 작년 한 해 동안 팀에 없어서는 안 될 투수였다. 노경은은 시즌 중 인터뷰에서 "(채식이) 체력적으로 도움이 됐다"며, "아무리 음식을 먹어도 90kg대 중반의 몸무게를 유지했다. 몸이 가벼워졌다"라고 말했다.
노경은의 활약에 고무된 선수들이 잇따라 채식을 시작하면서 선수단 식사에 대체육류가 제공되기도 했다. 작년 8월 26일부터 롯데 선수단 식단에는 식물성 고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1·2회 제공되는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채식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 야구계에 있어서는 무시할 수 없는 한 걸음이었다.
원 포인트 릴리프(One-point Relief, 1~2명의 타자만을 상대하기 위해 등판하는 투수) 좌완 언더핸드 투수를 주인공으로 다룬 만화 「그라제니」에서는 선수들의 식단 관리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나온다. 주인공 본다 나츠노스케는 입단 동기의 조언을 받아들여 철저한 식단 관리를 시도하지만, 자신보다 젊고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아무런 자제력 없이 술·담배와 육식을 하는 모습을 보며 좌절한다. 철저한 루틴을 지키는 자신에 대해 '조무레기'의 전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홧김에 찾아간 유흥 업소에서 만난 리그 최고의 타자가, 경기 당일날 아침까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날 아침도 본다 나츠노스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며 철저한 자기 관리를 이어갔다. 마침내 한 점차로 앞선 8회초 2사만루 상황에서, 술집이 아닌 그라운드 위에서 다시 만난 둘. 아직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리그 최고의 타자는 자신이 언제 숙취에 시달렸냐는 듯이 타격에 집중한다. 풀카운트까지 가는 피말리는 승부. 결과는 깊은 인코스를 공략한 본다 나츠노스케의 승리로 끝난다. 전날 밤 한 잔의 술을 더 마시지 않았기에, 아침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는 등 자신의 습관을 지켰기에 가능한 승리였다.
시대는 변했고 더 이상 '무작정 많이 먹는 것'은 운동선수의 미덕이 되지 않는다. 먹더라도 지혜롭게 먹어야만 한다. 아직까지도 경기 시작까지 '짬뽕'을 들이키고 그라운드에 오르는 선수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두 경기 못해도 타고난 재능으로 커버하는 선수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철저한 자기관리 끝에 결국 탄산음료조차도 스스로 금지하는, 고기를 씹는 즐거움을 포기한 이들을 이기지 못한다. '맞술 대결'의 시대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