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히어로즈] 05.30 ~ 06.04 키움 히어로즈 임창민
2014년 KBO리그의 평균 구속은 141km/h였다. 규정이닝을 소화한 선발투수 중 141km/h 이상의 평균 구속을 기록한 이는 아홉 명에 불과했다. 140km/h 중반을 던지는 아마추어 투수는 9개 구단 스카우트의 이목을 끌었으며, 150km/h를 던지면 괴물 신인이 나타났다고 대서특필 되었다.
지난시즌 KBO리그의 평균 구속은 144.2km/h였다. 8년 사이에 투수들의 평균 구속이 3km/h가량 상승한 셈이었다. 이는 특히 1년 전인 2021년에 비해 1.3km/h나 증가했기 때문에 더욱 의미를 가졌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된 김서현은 최고 157km/h의 광속구로 화제가 됐다.
올해 KBO리그 투수들의 평균 구속은 작년보다 더욱 빨라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규정이닝을 소화한 투수로만 한정해도 평균 145km/h 이상의 빠른 공을 뿌리는 선수가 14명이나 된다. 한화 이글스의 광속구 신인 듀오인 문동주와 김서현은 기어이 160km/h의 벽을 넘었다.
이제 고교야구계는 150km/h를 던지는 투수가 나왔다고 해도 발칵 뒤집히지 않는다. 당장 몇 달 뒤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3학년 투수 중 10명 이상이 150km/h 이상의 최고 구속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140km/h를 던지는 고등학교 3학년은 100명이 넘는다.
한때 KBO리그 1군 투수의 평균 지표였던 '141'의 숫자는 이제 프로야구 선수에게 있어 강점이 아니게 되었다. 위기의 순간 구원 등판이라는 이름으로 마운드에 올라 공 하나하나를 전력투구하는 불펜 투수의 평균 구속이 141km/h라면 더욱 곤란할 것이다.
하지만 키움 히어로즈의 베테랑 투수 임창민은 지난 16년간 평균 140km/h 초반의 패스트볼로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았다. 단순히 생존에 성공한 게 아니라 구원투수로서 달성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명예까지 누렸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겪은 두 번의 '정리해고'도 야구를 향한 그의 열망을 꺾지 못했다. 팬들이 그의 이름 석 자를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이유다.
2008년 신인 드래프트 2차 2라운드 전체 11순위에서 현대 유니콘스의 지명을 받았던 임창민은 연세대 시절 최고 143km/h의 빠른 공을 던지는 선발 에이스였다. 하지만 여러 불운이 겹치며 좀처럼 1군에 정착하지 못했다.
데뷔 시즌이었던 2008년에는 구단 문제로 스프링 캠프조차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범경기에 등판해 1이닝 2피안타 2볼넷 2실점으로 최악의 첫인상을 남겼고, 남은 1년을 오롯이 2군에서 보내야 했다. 2009년에는 6월과 8월에 한 번씩 마운드에 올라 1이닝 2피안타 3볼넷 4실점에 그쳤다.
2009시즌을 마지막으로 경찰청 야구단에 입대한 임창민은 퓨처스리그에서 2년간 14승을 올리며 선발 유망주로 거듭났다. 유승안 감독으로부터 허경민, 우규민과 함께 수훈 선수로 꼽히며 "컨트롤과 코너워크가 좋아졌고 스피드도 많이 올랐다"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1군 데뷔전에서 벌벌 떨며 연거푸 볼넷을 내주던 신인이 2군에서 준수한 선발 유망주로 영그는 동안에도 코치진은 임창민을 외면했다. 5년간 1군에서 5경기의 기회만을 받은 그는 군 제대 후 첫 시즌이 끝나자마자 신생 구단 NC 다이노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선수단 뎁스가 얇은 신생팀에 갔음에도 개막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그럼에도 임창민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열심히 던졌다. 하도 열심히 던져서 같은 팀 선배에게 너무 잘 던지려 하지 말라는 조언을 받을 정도였다. 투구폼도 바꾸고 마인드도 바꿨다. 다만 결정구는 여전히 평균 140km/h 초반의 패스트볼이었다.
패스트볼을 무기 삼아 퓨처스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뒤 패전 처리 투수의 역할을 부여받고 1군에 올라왔다. 아무도 결정구라고 생각하지 못한 평범한 포심 패스트볼을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에 던지며 타자들을 잡아 나갔다. 첫 등판서 0.1이닝 무실점을, 두 번째 등판에서는 1이닝 1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그다음 경기에서 생애 첫 홀드를 올렸다. 자꾸자꾸 잘 던지다 보니 1군 통산 5경기 출장이 전부였던 선수가 2013년 한 해 동안에만 54경기에 나섰다.
2년 연속으로 좋은 성과를 올리니 급기야 마무리 투수까지 맡게 됐다. 평균 142km/h의 패스트볼로 '뱀직구' 임창용, '고속 슬라이더' 윤석민 등 리그 최고의 파이어볼러들과 함께 구원왕 자리를 놓고 다퉜다. 그러는 동안 구단 최초로 30세이브를 올린 투수가 되었다. 선수단을 이끄는 투수 조장이 됐고 아마추어 시절에도 달아보지 못했던 태극 마크까지 가슴팍에 붙였다.
서른셋의 나이에 팔꿈치가 망가졌다. 프로 유니폼을 입은 이후 10년간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735.2이닝을 던졌으니 몸에 이상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30대의 나이에 생긴 1년의 공백에는 엄청난 무게가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복귀 후 최상의 구위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야 다시 내 자리를 찾지 않겠나"라고 너스레를 떨며 의욕적으로 재활에 임했다.
수술과 재활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2년의 공백이 생겼고, 한 번 손을 떠난 마무리 자리는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평균 구속 140km/h의 노장 투수의 품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쉬울 법했지만 "마무리 투수보다는 강한 불펜을 투입하는 게 대세이지 않나"라며 아랑곳 않는 모습을 보였다. 복귀 후 3년간 110경기서 93이닝을 던지며 7승 30홀드를 기록하며 제 몫을 다했다. 소속팀의 창단 첫 우승도 함께했다.
2021년에는 전년도에 5점대였던 평균자책점을 3점대로 개선함은 물론 부상 전후로 140km/h까지 떨어졌던 평균 구속도 전성기와 비슷한 수준인 142km/h대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예전만큼 타자들을 압도하는 모습은 보이지 못했다. 36세 시즌을 마친 임창민은 전면적인 세대교체 작업 중이었던 NC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두산 베어스에 재취업했지만 1년 만에 다시 방출당했다.
10년 만에 친정팀으로 돌아온 임창민은 애초에 홍성민, 변시원 등 다른 방출생 출신 투수들과 함께 가비지 이닝을 소화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지난 5월 말부터 5년 전 내려놓았던 마무리 보직을 맡고 있다. 문성현·이승호·원종현 등 필승계투 자원이 전부 부상으로 이탈하고 김재웅이 작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마무리 보직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평균 141.4km/h·최고 144km/h로 리그 평균 구속에 못 미치는 패스트볼과 130km/h 중반대에서 형성되는 슬라이더, 포크볼은 무엇 하나 위력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에게는 지난 10년간 평범한 공으로 국가대표 마무리의 자리에 올랐던 경험과 관록이 있었다. 고형욱 단장은 "선수들이 모두 어려 경험 있는 선수들과의 조화가 있어야 할 것 같다"라며 임창민을 영입했고, 임창민은 그 기대에 보답했다.
5월 21일 광주 KIA전. 한 점 차로 앞선 9회말에 소크라테스 브리또 - 최형우 - 김선빈으로 이어지는 중심타선에 맞서 마운드에 오른 임창민은 최고 143km/h의 포심으로써 단 하나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2018년 4월 4일 마산 삼성전 이후 1467일만의 세이브였다. 23일 수원 KT전에서는 문상철 - 박병호 - 앤서니 알포드를 상대로, 28일 고척 롯데전에서는 1번 타자가 선두 타자로 나서는 상위타순에 맞서 세이브를 챙겼다.
그리고 6월 4일. 리그 1위팀 SSG 랜더스에게 한 점 앞선 9회말. 경기를 끝내기 위해 불펜 문을 열고 나온 임창민은 최지훈 - 최주환 - 최정으로 이어지는 강타선에 맞서 공을 던졌다. 최지훈과 최주환의 타구 모두 절묘한 코스였다. 하지만 이틀 전 헐거운 수비로 역전패의 빌미를 만들었던 야수진이 집중력을 발휘해 안타를 아웃 카운트로 둔갑시켰다. 마지막 타자인 최정에게는 늘 그랬듯 '142km/h 포심'과 '135km/h 슬라이더'라는 당혹스러운 공을 한복판에 던졌다. 사흘 내내 불을 뿜었던 최정의 방망이가 힘차게 돌았지만 타구는 거짓말처럼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역대 20번째 100세이브, 역대 최고령 100세이브 투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신인 드래프트 전날 제발 현대만 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KIA팬 대학생은 15년 뒤 "정을 줄 수 있는 팀을 찾았다"라며 다시 한번 히어로즈 유니폼을 입었다. 사회인 초년생 시절 강진군에서의 직장생활을 가장 힘든 시기로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008년에도 강속구라고 부르기 어려웠던 패스트볼을 무기삼아 오늘날 역대 최고의 구원투수 중 하나가 됐다. 한때는 선수 본인도 자신의 공을 믿지 못했지만 그러든 말든 '마운드에서 타자를 잡아먹어야겠다'라는 마음가짐으로 던진 결과였다.
그렇게 임창민은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았다. 결코 추억으로 여기게 될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시절도 인생의 한 페이지로서 가슴에 새기면서. 남들에 비해서 특출난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게 어쨌냐는 듯 당당하게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선수는 많다지만 임창민의 야구가 끌리는 이유는 그래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