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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Jun 13. 2023

3할까지 72일 걸렸다, 이정후는 더욱 강해졌다

[지난주 히어로즈] 06.05 ~ 06.11 키움 히어로즈 이정후

키움 히어로즈의 외야수 이정후가 6월 11일 수원 KT전에서 4안타를 몰아치며 3할 타율에 입성했다. 개막전에서 4타수 1안타를 기록하며 2할 5푼으로 2023시즌을 시작했던 이정후는 이날 경기 전까지 단 하루도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지 못했다. 정규시즌 개막 72일 차에 겨우 3할 타자가 된 셈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타율 이외의 성적이다. 70개의 안타(3위), 3할 9푼 3리의 출루율(6위)과 4할 7푼의 장타율(9위), 34개의 타점(8위)과 35개의 득점(6위), 그리고 151.8의 wRC+(Weighted Runs Created Plus, 조정 득점 창출력)까지 모든 지표가 최상위권이다. 이 때문에 지난 월요일에는 각종 야구 커뮤니티에서 이정후가 3할 타율을 복구했다는 소식에 그의 성적을 찾아보던 야구팬들이 경악하는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정후가 정규시즌 개막 직후 3할 타율을 기록하거나 유지하지 못하는 슬럼프(?)를 겪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갓 프로에 데뷔해 부상으로 이탈한 임병욱의 빈자리를 대신했던 2017년, 부상으로 다가오는 시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2019년, 그리고 2021년 4월에 다소 부침을 겪었다.


아니, 정확히는 '성장통'을 겪었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잠깐 식었던 방망이를 다시 손에 쥔 이정후는 마치 시큰거리는 하룻밤을 보낸 어린아이가 다음날 한 뼘 커진 몸으로 기지개를 켜듯 이전보다 한 차원 다른 스윙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 학창 시절 아픔으로 뛰어넘은 신인의 부담감

""이종범 아들이니까 당연하지", "이종범 아들인데 왜 못해"... 이런 말을 계속 듣게 될 테니 야구라도 잘하자고 다짐했어요."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신인 드래프트에서 넥센(現 키움)의 1차지명을 받았을 때만 해도 즉시전력감으로서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그의 방망이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수비가 많이 부족하다는 평이었기 때문이다.


시범경기에서 12경기 35타석 동안 4할 5푼 5리의 타율을 기록했으나 그를 신인왕 후보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LG 트윈스와의 개막전 경기에서 한 점 차로 뒤진 8회말에 선두타자 대타로 기용돼 외야 플라이로 물러났다. 텍사스 안타가 될 수 있는 타구가 외야수의 호수비로써 아웃으로 둔갑했다. 3연전 동안 5타수 무안타로 침묵했다. 장정석 前 감독은 "이정후의 운이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2번 중견수로 선발 출장한 정규시즌 네 번째 경기에서 3타수 3안타 1볼넷으로 전 타석 출루를 해냈다. 롯데 자이언츠의 우완 에이스 박세웅을 상대로 좌·중·우 모든 코스에 하나씩 안타를 만들었다. 정규시즌 세 번째 시리즈에서는 데뷔 첫 홈런을 잠실 야구장에서 신고한 것으로도 모자라 마지막 타석에서도 담장을 넘기며 멀티홈런을 터뜨렸다. 4월 중순 들어서 무안타 경기가 늘어나고 한때 0.9를 넘겼던 OPS(On base Plus Slugging, 출루율+장타율)도 0.705까지 떨어지며 신인의 한계가 드러나는 듯했다. 하지만 4월의 마지막 경기서 멀티히트로 3할 타율을 회복한 이정후는 그날부터 정규시즌 최종전까지 모든 경기에 출장하며도 3할 타율을 유지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인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는 정신력을 보여줬다.


어쩌면 이정후는 프로 초년생 시절 겪어야 했을 모든 마음고생을 처음 야구 글러브를 꼈던 순간부터 모두 몰아서 겪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 이종범은 1990년대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했던 간판스타였고, '이종범의 아들'이라는 후광 아래서 이정후의 이름 석 자는 휘문고 유니폼을 벗는 날까지 철저히 지워졌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야구 대회에서 상을 받자 축하와 격려의 박수 대신 아버지 덕에 상을 받았다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시합 중에는 상대 팀 학부모로부터 "너희 아빠도 어제 삼진을 당했으니 너도 삼진이나 당하라" 같은 비아냥을 들었다. 잘하면 "이종범 아들이니까 당연하다", 못하면 "이종범 아들인데 왜 못하냐"라는 말이 따라왔다. 물론 그는 프로 무대에 데뷔하기 전부터 어마어마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스타 플레이어였다. 동시에 철이 들기 한참 전부터 깔보는 시선과 부러움 섞인 조소에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너무 밝아서 그림자 하나 지지 않았던 학창 시절을 보낸 열아홉 소년에게 '1차지명 신인의 중압감' 따위는 한 달 안에 이겨낼 수 있는 무게였다. 첫해에 고졸 신인 최초 3할 타율, 신인 최초 전 경기 출장, 역대 신인 시즌 최다 안타의 기록을 이뤄낸 그는 이듬해 부상에 시들리면서도 3할 5푼 5리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2018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야구 국가대표팀 승선, 데뷔 첫 골든글러브 승선의 영광을 모두 누렸다.




● 이정후는 4년 전 4월에도 2할 2푼까지 타율이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코치님이 항상 "실수해도 괜찮다. 다이빙해서 공이 뒤로 빠져도 괜찮다. 과감하게 해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준플레이오프에서 수비 도중 어깨 부상을 입으며 아쉽게 2018년을 마무리했던 이정후는 이듬해 개막 직후 두 달 가까이 2할대 타율에서 허덕이는 슬럼프(?)를 겪었다. 어깨 수술의 여파가 전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한 탓이었다. 5월이 돼서야 정상 컨디션이 아님을 인정하고 몸 상태에 맞춰 경기에 임하기 시작한 이정후는 5월 16일부터 정규시즌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3할 아래로 타율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상 없이 온전하게 겨울을 보냈던 다음 해에는 개막전부터 정규시즌 최종전까지 1년 내내 3할 타율을 유지함은 물론 데뷔 이후 처음으로 두 자릿수 홈런(15개)을 쳐냄으로써 커리어 내내 따라다니던 파워툴에 대한 물음표까지 지워버렸다.


2021년 4월에는 한때 2할 3푼 1리까지 타율이 떨어졌으며 한 달 전체의 성적을 톺아봐도 2할 6푼 9리의 타율에 0.717의 OPS의 평범한 성적에 그쳤다. 롤모델인 크리스티안 옐리치의 안 좋을 때처럼 타구의 속도는 빠른데 발사각도가 11.4도에 그치면서 땅볼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탓이었다.


하지만 2년 만에 다시 찾아온 '한 달의 침묵'을 깨뜨린 이후에는 최악의 타고투저로 평가받는 2010년대 후반에도 최고 3할 5푼 5리였던 타율을 3할 6푼 1리까지 끌어올리면서 전년도에 비해 홈런 수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커리어하이 시즌을 경신했다. 지난해에는 2021년의 좋은 점을 모두 유지하면서도 타구 발사 각도만 높임으로써 프로 6년차만에 처음으로 '단일 시즌 20홈런'의 벽을 넘었다.


4년 전에도, 그리고 2년 전에도 이정후에게 부진한 순간은 분명히 있었다. 다만 또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가 시련을 극복할 때마다 이전보다 훨씬 강한 타자가 되어 메이저리거의 꿈을 향해 몇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갔다는 것이다. 마치 위기를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더욱 강해지는 소설 속 영웅들처럼 말이다.




● 최악의 부진? 뭐 어때요, 이제 상상 이상의 놀라움과 마주할 텐데

"자신의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잖아요. 야구장에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할 겨를 없이 본인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열심히 뛰어야죠."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이번 시즌을 앞두고 타격폼을 전면 수정했다. 평균 구속 153km/h로 투수들의 공이 KBO리그보다 10km/h 가까이 빠른 MLB의 강속구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3월에 열렸던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만 해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에이스 다르빗슈 유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좌완 파이어볼러 이마나가 쇼에게 안타를 쳐내는 등 타격폼 교정이 성공한 듯했다. 하지만 막상 정규시즌에 들어와서는 4월 한 달 내내 타율 3할은커녕 2할 5푼도 치지 못하는 최악의 부진을 겪었다.


정규시즌 초반의 부진이 처음은 아니지만 MLB행을 1년 앞두고 찾아온 슬럼프였던 만큼 정신적인 타격이 컸다. 항상 나이에 비해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던 이정후가 지난 두 달 동안에는 그라운드 위에서 예민한 감정을 종종 표출하곤 했다. 하지만 결국 최악의 시간은 지나갔고 새로운 3연전의 시작을 10시간 남짓 앞둔 현재 이정후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성적을 올리고 있다.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는 "이제 완전히 타격감이 돌아온 것 같다"라며 배터박스 위에서 다시 이정후의 시간이 찾아올 것임을 암시했다.


더욱 좋은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며, 변화에는 위험이 동반함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이정후다. 얼마 전까지의 악몽 같았던 나날에 대해서도 "시도 자체는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더 좋은 선수가 되고 싶었고, 제자리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방법이 있다면 모험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말할 정도다. 요컨대 고척 스카이돔을 가득 채운 관중들의 환호가 비난과 야유로 바뀌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넘어지면서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됐다는 것이다. 기실 아마추어 시절에 이미 타의에 의해 계속해서 눈치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깨달은 그이니, 자신의 일시적인 부진에 대한 타인의 시선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이정후는 이제 슬럼프에서 탈출했고 키움의 정규시즌 잔여 경기는 84경기로 절반 이상이 남았다. 어쩌면 2023년은 그의 KBO리그에서의 커리어를 수 놓는 최고의 한 해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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