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히어로즈] 08.22~08.27 키움 히어로즈 김시앙
프로에 지명됐을 당시부터 "수비만 보고 뽑았다"라는 평을 받은 고졸 신인이 있었다. 투수를 제외한 그라운드 위의 모든 선수는 경기 중 적어도 세 번씩 방망이를 들고 배터박스에 들어서야 함을 생각하면 분명 좋은 말은 아니었다. 직업 야구선수가 되고 나서도 아쉬웠던 타격 능력은 겨우 10대를 벗어난 그의 역할을 한정 지었다. 국가대표 출신의 15년 선배가 부진하며 주전 경쟁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타격을 이유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배에게 우선권이 돌아갔다. 2군에서도 2년 후배에게 많은 출전 시간을 양보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아쉬운 타격이 그 이유였다.
무거워 봤자 1kg 남짓한 나무 방망이를 휘두르는 문제 때문에 많은 이들로부터 백업 포수의 틀을 넘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참 어릴 때부터 매일 서너 시간씩 3kg짜리 장비를 착용하고 쭈그려 앉아있던 그로서는 퍽 억울한 일이었을 테다. 그래서 그라운드 위에 만연했던 편견을 깨뜨렸다. 후배의 체력 관리를 이유로 올라서게 된 1군 무대에서 안타를 쳤다. 얼마 뒤에는 생애 첫 멀티히트를 기록했다. 이틀 뒤에는 3안타를 몰아쳤다. 올해 내내 2군에서 17안타를 친 타자가 지난 일주일 동안에만 7안타를 쳤다. 수비만큼은 괜찮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타석에서도 자신을 지켜보게 만들었다.
그렇게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씨앗은 꼬박 3년 만에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아직 꽃봉오리를 터뜨리지는 못했지만 망울진 모습만으로도 관중석의 모두를 넋 놓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 꽃의 이름이 궁금한가? 앞으로 두 달 뒤면 스물두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키움 히어로즈 포수진의 예비 2인자, 김시앙이다.
갓 중학교를 졸업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모교 야구부의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신입생이라고 믿을 수 없는 탄탄한 수비 기본기를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스트라이크 존 바깥에 걸친 투수의 공을 스트라이크로 만들어 내는 프레이밍, 온몸으로써 폭투를 막아 투수가 마음 편히 공을 던질 수 있게 하는 블로킹 능력 모두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좌완 투수로서 최고 150km/h의 강속구를 던지며 아마야구 최대어로 평가 받던 2년 선배 김기훈과 합을 맞춘 김시앙은 모든 경기에서 포수 마스크를 쓰며 광주동성고의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김기훈이 졸업한 이후에도 2학년 때 최고 145km/h를 던진 에이스 김영현, 드래프트 당시 고교야구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던 신헌민과 배터리를 이루며 모교를 청룡기 결승까지 올려놓았다.
2010년대 후반 광주동성고가 오랜만에 다시 맞이한 전성기의 중심에는 김시앙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김시앙 자신은 타자로서의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2할 5푼 8리의 타율과 0.609의 OPS(On base Plus Slugging, 출루율+장타율), 그리고 0.31의 BB/K(볼넷-삼진 비율)은 저학년 시절 괄목할 만한 성적을 올리지 않은 이상 프로 지명을 노리지 어려운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김시앙은 3년 내내 비슷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상원 키움 스카우트 팀장은 신인 드래프트 직후 김시앙에 대해 "공수 양면에서 발전 가능성이 있지만 지금은 모두 중간 정도인 선수 대신 수비가 확실한 선수를 뽑았다"고 코멘트했다. 타격에 대해서는 "공격력이 조금 떨어져도 타격코치가 만들어 줄 수 있다"라고 말하는 데 그쳤다.
버건디 유니폼을 입게 된 후에도 김시앙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수비면에서는 나무랄 것이 없었다. 고교 졸업 직후 참가한 1군 스프링캠프에서 주전 포수 박동원으로부터 "캐치볼을 할 때 공에서 힘이 느껴진다. 내가 그 나이 때 시앙이처럼 던졌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라며 칭찬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타격 또한 고교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난 3년간 2군 121경기서 294타석의 기회를 받았으나 2할 2푼 7리의 타율에 그쳤다. 장타가 8개(2루타 7·홈런 1)에 그칠 정도로 파워 히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삼진이 볼넷보다 2배 가까이 많았다. 작년에는 시즌 중 주전 포수 박동원이 트레이드됨에 따라 100일 넘게 1군 선수단과 동행하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타자로서는 단 14타석의 기회만을 받았다.
좀처럼 늘지 않는 타격과 함께 김시앙의 입지는 시시각각 좁아졌다. 현장에서는 김시앙에 대해 "투수 리드도 좋고 장점이 많은 선수"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한편 끊임없이 포수 유망주를 모았다. 202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매년 좋은 타자를 배출하는 휘문고등학교의 주전 포수 김리안과 부산·제주권 고교야구 주말리그 후반기 홈런왕 박정훈을 지명했다. 지난겨울에는 고교 포수 빅 3중 두 명이었던 김건희와 김동헌, 대전고등학교의 28년만의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이끈 박성빈, 그리고 각각 좋은 파워와 컨택을 가진 변헌성과 안겸이 후배로 들어왔다. 이들 중 김리안과 박성빈은 이번 시즌 퓨처스리그에서 많은 경기에 출장하며 김시앙과 플레이 타임을 나눠 가졌다. 김동헌은 1군 주전 포수가 됐다.
어린 나이의 선수에게는 터무니없는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김시앙은 조바심 내지 않고 서서히 무대 위에 올라가기로 했다. 1년차 딱지를 떼자마자 언제든 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후배들이 우르르 들어왔지만 조바심내지 않고 눈앞의 과제를 하나씩 해나갔다. 그러자 어느새 2군 감독으로부터 "페이스가 좋다"라며 칭찬받음은 물론 다른 팀 코치들도 탐을 내는 유망주가 됐다. 지난해에는 1군 엔트리에 있는 동안 많은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대신 2군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배웠다. '내가 저 자리에 있다면,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등을 생각하며 더 공부하려 했다. 시즌 종료 후 참가했던 호주프로야구(ABL)에서는 조현우, 김기연 등에게 밀려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2할 8푼 6리의 준수한 타율을 기록했다.
최근에는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한 타격 전략으로써 1군 투수들을 상대로 유의미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고교 시절의 김시앙은 자신만의 타격 메커니즘과 파워 툴이 없다는 약점을 컨택 능력과 빼어난 수 싸움으로 커버하는 타자였다. 힘이 좋은 타자들처럼 좋은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확실한 노림수로써 박재민, 허윤동, 이의리 같은 초고교급 투수들에게도 안타를 뽑아내곤 했다. 이번 시즌의 김시앙은 지난해 54.6%에 불과하던 컨택을 81.4%로 끌어올렸다. 배트 적극성이 59.7%에 달할 만큼 매우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돌리면서도(규정타석 1위 양석환·52.1%) 헛스윙은 16.7%로 준수한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2스트라이크까지 몰린 상황에서도 여전히 80%의 컨택률을 유지함으로써 투수와의 수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김시앙과 비슷한 타격 어프로치를 갖고 있는 타자로는 같은 팀의 15년 선배 겸 국가대표 포수 이지영이 있다. 타석당 투구수가 4개 이상인 시즌이 없을 정도로 적극적인 승부를 즐겨하는 이지영은 리그 상위권의 컨택 능력으로써 포수임에도 불구하고 통산 2할 7푼 9리의 준수한 타율을 기록 중이다. 젊은 시절에는 단순히 어떤 공이든 휘두르고 보는 배드 볼 히터로서 '초구지영'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연륜이 쌓인 2010년대 후반부터는 2스트라이크에 몰린 뒤 투수의 공을 끈질기게 커트하며 원하는 공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타격 전략을 수정했다. 김시앙은 지난가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내 마음속 MVP는 이지영 선배님"이라며 이지영의 플레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시앙이 롤 모델로 삼고 있는 이지영은 말 그대로 바닥에서부터 정상의 자리까지 올라간 자수성가 신화의 주인공이다. 대학생 시절 신인 드래프트에서 어느 팀의 지명도 받지 못해 육성선수 신분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수비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2라운더 출신 유망주 이정식, 진갑용의 뒤를 이어 10년간 삼성 라이온즈의 안방을 지킬 것으로 기대받던 현재윤이 경쟁자였기에 전망이 좋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결국에는 본인의 실력으로써 쟁쟁한 경쟁자를 모두 물리치고 삼성의 4년 연속 통합우승 신화를 이끈 국가대표 포수로 성장했다. 대선배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전부 닮고자 하는 스물둘 청년이 가슴속에 새긴 목표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청쾌한 연못 위에서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이미지를 가진 연꽃은 더러운 진흙탕에서도 꿋꿋이 제 봉오리를 터뜨리기로 유명하다. 오래전부터 삼국시대 선비는 물론 원산지인 인도에 걸쳐 그리스까지, 전 세계 방방곡곡의 사랑을 받아온 이 꽃의 꽃말은 '깨끗한 마음'이다. 오수에서 새싹을 틔워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끝내 제 아름다움을 펼치는 모습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테다.
키움 팬들이 김시앙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4할 타율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1군 무대에서 멀티히트를 기록하고 3안타를 몰아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웃 카운트를 마주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명한 스카우트부터 코치, 감독까지 모두가 입을 모아 '수비는 좋다'는 말을 하는 동안 방망이도 좋은 포수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짐작 가기 때문이다. 프로 입단 전 3년간 변치 않는 타격 성적표 성적을 보면서도 지쳐 주저앉지 않고 포수 마스크를 썼던 그의 입시 생활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테다. 이 모든 서사가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인데, 어떻게 그의 지난 일주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김시앙의 커리어는 이제 겨우 시작됐다. 그가 달려가고 있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당장 내일 경기에서부터 실패로 향하는 갈림길에 잠깐 잘못 들어설 수도 있다. 그럼에도 김시앙은 여태 그래왔듯 꿋꿋이 제 길을 걸어갈 것이다. 팬들도 홈 플레이트 뒤 모래 속에서 자라는 것이 화려한 꽃봉오리이길 바라며 계속 응원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