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움 히어로즈 김인범
KBO리그 키움 히어로즈 소속 투수 김인범이 데뷔 후 19.2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며 해당 부문 신기록을 경신했다. 김인범이 등장하기 전까지 신인으로서 가장 오랜 이닝을 던지며 실점하지 않았던 투수는 현대 유니콘스의 마무리 투수였던 조용준이다. 2002년 처음으로 1군에 올라왔던 조용준은 데뷔 직후 4년간 115세이브를 올리며 소속팀의 한국시리즈 2연패를 책임졌다. 22년 전 23세의 '레전드 마무리'가 세웠던 경이로운 기록이 24세의 '선발투수' 김인범에 의해 깨진 것이다.
스포츠 언론은 최고 150km/h대 강속구를 던지던 '파이어볼러'의 기록이 최고 구속 140km/h의 '모닥불러'에 의해 깨진 점에 주목했다. 김인범의 2024시즌 평균 구속은 138km/h다. 이는 KBO리그 전체 투수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143.8km/h)보다 5km/h나 느린 수준이다. 김인범은 26일 경기 후 자신을 향해 마이크를 들이댄 기자들에게 "공이 느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면서도 "그래서 제구를 잡는 데 집중하고, 타자와 타이밍 싸움도 많이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사실, 김인범은 3년 전까지만 해도 최고 145km/h의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다. 문동주, 김도영과 함께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어 가장 많은 이닝을 던졌던 '한국 야구의 미래'였다. 키움이 투수진의 힘을 앞세워 우승에 도전했던 2022년에 5선발 후보로 기대한 '준비된 유망주'였다. 단지 날개를 펼치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갑작스레 찾아온 어깨 부상이 모든 것을 백지로 만들어버렸을 뿐이었다. 이미 너무 많은 눈물을 훔쳐냈던 그에게, '끔찍한 시련' 따위는 아무런 좌절도 안겨주지 못했지만 말이다.
김인범은 2019년 신인 드래프트 당시 키움이 '미래의 토종 에이스'로 기대하며 지명한 자원이었다. 상체 위주의 미완성인 투구폼임도 불구하고 패스트볼의 최고 구속이 140km/h대를 넘겼다는 점,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188cm·90kg의 훌륭한 하드웨어를 가졌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테일링이 걸리는 패스트볼과 낙차 큰 커브라는 확실한 구종을 가진 것 또한 매력적이었다. 장기적으로 육성할 만한 선발 유망주라는 평을 받았다.
프로 유니폼을 입고 나서는 꾸준히 퓨처스리그에 경기에 출장했다. 1년차에는 15경기서 43이닝 50피안타 17볼넷 평균자책점 5.44, 2년차에는 14경기 32이닝 49피안타 26볼넷 평균자책점 9.28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선수 본인도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다'라고 돌아볼 정도였다. 하지만 3년차 들어 2군 평균자책점이 3점대까지 하락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 해에 처음으로 1군 무대도 밟았다. 3경기서 5.1이닝 5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으며, 9월 5일 SSG전에서는 최고 144km/h의 빠른 공을 던졌다.
구단의 적극적인 서포트 하에 외국인 선수들을 상대로 많은 공을 던질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데뷔 시즌이었던 2019년에는 창단 2년차였던 질롱 코리아의 파견 멤버에 포함되었으며, 2선발로서 팀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이닝(48.1이닝)을 던졌다. 1군에 데뷔했던 2021년에는 23세 이하(U-23)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주승우, 문동주, 김도영 등 202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최상위 지명을 받은 초특급 유망주와 한솥밥을 먹은 김인범은 팀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던지면서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2021시즌의 모든 일정을 마친 뒤 마무리 캠프에 참가한 김인범은 자신의 프로에서의 첫 3년에 대해 '60점'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내년에는 1군에서 30이닝 이상을 던지는 것이 목표"라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이듬해 시즌 개막을 앞두고 처음으로 1군 스프링캠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홍원기 감독은 처음으로 1군 선수단과 함께 봄을 보내게 된 이 투수에 대해 "중간에서 힘을 보태줄 투수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김인범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김인범은 2022 스프링캠프 6일차에 불펜투구 중 어깨 통증을 느꼈다. 정확히는 전년도 11월부터 느낀 통증이었다. 재활군으로 보내졌고, 캠프에 복귀하지 못한 채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러 떠났다.
국군체육부대 소속이 된 김인범은 입영 첫 해 여름까지 재활에 매진한 뒤, 그해 9월부터 다시 실전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투수로서 가장 민감한 부위를 다친 일에 대한 후유증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2022년에는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거의 매 이닝마다 하나씩 볼넷을 내줬다(12.1이닝 12볼넷). 2년차에는 30경기에 나와 28이닝을 던지는 동안 30개의 피안타와 19개의 사사구를 허용하고 5점대 후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시즌 개막 전 스프링캠프에서도 대만 프로야구단 중신 브라더스와의 연습 경기에서 부진했다.
그런데 시범경기 때부터 차근차근 반전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등판에서는 볼넷 두 개를 내줬으나 1.1이닝을 무자책으로 막았다. 이틀 뒤에는 팀의 두 번째 투수로 올라와 2이닝 동안 단 하나의 출루도 허용하지 않았다. 닷새 뒤에는 선발 등판의 기회를 얻었다. 전년도 우승팀인 LG 트윈스의 강타선을 상대로 3이닝 동안 단 27구를 던지면서도 하나의 안타만을 내줬다. 최고 구속이 4km/h 떨어졌다느니, 1군 스프링캠프에서 중도 탈락 했다느니 하는 자질구레한 시련을 전부 넘어서고 '1군 토종 5선발 후보'가 됐다.
홍원기 감독이 신인 선수들에게 우선적인 기회를 부여하기로 결정하면서 개막 엔트리 승선에는 실패했다. 정규 시즌 개막으로부터 약 일주일 뒤 1군에 등록됐지만, 불펜 투수로 경기에 나섰다. 다섯 점 차로 앞선 편한 상황에서 첫 등판을 가지며 1이닝 1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닷새 뒤, 두 점 차로 뒤진 6회초 1사 주자 2루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 1.1이닝을 깔끔히 막았다.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구원 등판에서도 모두 1이닝을 던지면서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했다. 그 사이에 자신보다 먼저 선발 기회를 받은 손현기가 2군으로 내려갔다. 2024년의 여섯 번째 1군 등판 기회는 선발 투수로서 얻게 되었다.
4월 21일 일요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1군 선발투수로 데뷔했다. 김인범을 상대하는 두산의 타선은 앞선 1차전에서 13안타를 몰아치며 방망이를 데워놓은 참이었다. 1회부터 톱 타자 정수빈과 2번 3루수 허경민의 타구가 외야로 뻗었다. 2회에는 앞선 경기서 홈런을 기록한 김재환의 타구가 라인 드라이브성으로 뻗었다. 5회까지 총 11개의 뜬공이 나왔다. 하지만 단 하나의 타구도 야수 사이로 떨어지지 못했다. 타자들이 잘 친 게 아니라, 투수가 볼 끝이 더러운 패스트볼과 다양한 변화구로써 타자들을 뜬공 아웃으로 요리한 것이었다. 김인범은 이날 경기서 5이닝 60구 1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했다.
26일 삼성전에서도 팀의 첫 번째 투수로서 공을 던진 김인범은 4회까지 단 한 점도 허용하지 않았다. 5회 들어 다소 흔들리며 점수를 내줬지만, 이마저도 단 한 점 뿐이었다. 이날 김인범은 KBO리그의 데뷔 후 최다 이닝 무실점 신기록을 경신했다.
김인범은 지난 두 번의 선발 등판에서 모두 상대 팀의 에이스 투수와 맞붙었다. 선발 데뷔전 맞상대였던 라울 알칸타라의 이번 시즌 평균 구속은 149.1km/h로, 김인범의 최고 구속보다 9km/h 이상 빠르다. 최고 151km/h의 포심 패스트볼을 구사하는 원태인은 삼성의 토종 1선발임은 물론 동 나이대 투수 중 최고의 커리어를 쌓고 있다. 이런 투수들을 상대로 김인범이 조금도 위축되는 일 없이 자신의 125%를 뽐낸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상대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주저앉기엔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 아닐까.
초등학생 시절 또래에 비해 체격이 작았던 김인범은 자신에게 소질이 없다는 생각에 잠시 야구를 그만뒀다.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 다시 야구가 하고 싶어졌지만, 그를 받아주려 했던 학교는 거의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중학교로 진학해서 숙소 생활을 하며 야구공을 잡았다. 어린 나이에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울어도 많이 울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약체팀인 전주고등학교 야구부의 에이스로서 마운드를 홀로 이끌다시피 했다. 지명 직후 인터뷰에서 후배들에게 "잘 안되고 힘들어도 '된다! 된다!' 하면서 계속 되뇌어야 한다"라는 조언을 남겼다. 김인범 자신도 그랬을 것이다.
2년차에 퓨처스리그에서 방출돼도 이상하지 않은 성적을 올렸다. 3년차에 성적이 좋아지며 1군에서 많은 기회를 받나 했더니 어깨 부상을 당했다. 5km/h에 가까운 구속을 잃어버렸다. 재활과 실전 등판을 병행했을 군 복무 기간 동안에는 불안한 성적을 남겼고, 전역 후 첫 1군 스프링캠프에서 연습경기에서의 부진을 이유로 중도 탈락했다. 여기까지가 김인범의 프로야구 선수로서의 첫 5년이다. 이 모든 일을 극복하고 1군의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서있는 것이 2024년, 24세의 중고 신인 김인범이다. 그런 그에게 고작 자신보다 훨씬 빠른 공을 던지는 상대 팀 투수가, 홈런 좀 친다고 해봤자 1년 내내 3~40개 정도 치는 4번 타자 따위가 무서울까.
김인범은 201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키움의 지명을 받은 직후 "(프로에서) 그냥 잘하고 싶은 선수가 되고 싶다. 히어로즈 하면 김인범이 떠오르도록 하고 싶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지난 2주일 동안 히어로즈 팬들이 응원팀을 떠올렸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선수 중 하나는 김인범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가 남겼던 포부 중 한 마디가 더 있다. "그리고 역시 프로야구에서 신인의 목표는 신인왕 아닐까요." KBO리그의 신인왕 후보 조건은 '1군에서 30이닝 혹은 60타석 미만을 소화한 입단 6년차까지의 선수'다. 현재까지 1군에서 총 20.2이닝을 투구한 김인범은 올해로 데뷔 6년차를 맞이하는 선수다. 그는 올해 신인왕 투표에 입후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