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움 히어로즈 고영우
교육통계에 의하면 2023년 전국 고등학교의 대학 진학율은 72.8%에 달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사실상의 의무교육 기관이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에 진출하는 청년들은 "왜?"라는 질문을 받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 당연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 공간이 있다. 10대의 나이에 취직하면 축하를 받고, 대학생이 되면 언더독 취급을 받는 직군이 있다. 바로 야구 선수들이 그렇다.
201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0개 구단의 지명을 받은 대졸 선수는 전체 115명 중 42명이었다. 202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 받은 110명의 선수 중 대학 선수는 29명이었다. 단순 비율로 놓고 보면 10년 사이 대학 출신 신인 선수의 비율이 37%에서 26%로 줄어들었다. 심지어 2024년 신인 드래프트는 얼리 드래프트 제도가 도입되어 2학년 선수도 드래프트에 신청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그랬다.
하지만 지난해 신인 드래프트 결과표를 받아 든 프로야구 팬들은 프로 유니폼을 입게 된 대학 선수의 숫자에 한탄하는 대신 '생각보다 많이 뽑혔다'라며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 이전의 4년간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은 대학 선수의 수는 스무 명을 넘지 못했으며(20년 18명 - 21년 18명 - 22년 17명 - 23년 17명), 비율은 15~16%대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KBO리그에 참가하는 프로야구단의 대학생 야구선수에 대한 외면은 적어도 21세기 내내 계속되고 있다. NC 다이노스와 KT 위즈가 차례로 창단하며 프로구단의 수요가 고교야구의 선수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던 시기인 2010년대 초·중반을 제외하면, 대학에 진학한 야구선수가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받는 비율은 거의 항상 10~20% 수준에 그쳤다. 이는 2019년 신인 드래프트부터 각 구단이 대졸 선수를 무조건 1명 이상 지명해야 하는 규칙이 생겼을 감안하면 더욱 처참하다. 과거 '즉시전력감'으로 평가 받았던 대학 선수는 지난 몇 년간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명하는 선수'가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대학생 야구선수의 드래프트 지명 비율 감소만큼 심각한 것은, '대졸 최대어'가 상위 라운드에서 지명받는 숫자가 2010년대 후반 들어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201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상위 라운드(4라운드 이내) 지명을 받은 대졸 선수는 전체 지명자 39명 중 10명이었다(25%). 하지만 201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전체 7명으로 줄었고, 201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급기야 두 명 만이 상위 라운드에서 지명됐다. 201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이정용(동아대·1차 지명·LG 트윈스), 2023년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김유성(고려대·2라운드·두산 베어스)만 상위 라운드에서 프로구단의 선택을 받았다. '대학야구 최대어'라는 타이틀은 더 이상 스카우트의 이목을 끌지 못하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학야구는 프로구단은 물론 언론과 야구팬, 그리고 심지어 선수들에게도 외면 받는 실정이다. '프로야구'가 메인 아이템인 스포츠 언론의 기획 회의에서 '대학야구'는 우선순위 최하위의 취재 아이템이다.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프로야구단이 신인 드래프트에서 대졸 최대어를 상위 라운드에서 지명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환호하는 대신 우려하거나 반발한다. 성환희 <한국일보> 문화스포츠부 차장은 대학야구를 취재하며 '요즘 대학선수들에겐 이미 패배 의식이 깔려 있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2024년, 한국 야구계에서 프로 입단을 꿈꾸는 대학생 야구 선수들은 '언더독'의 위치에 있다.
그렇기에 대졸 야구선수의 활약은 더욱 빛난다. 언더독의 성공 서사는 거대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고영우는 타격만 놓고 보면 고교 시절에 이미 검증이 끝난 선수였다. '부산 야구의 자존심'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경남고등학교 야구부의 주전 3루수였던 고영우는 3학년 시절 20경기 92타석에서 4할 타율과 2홈런 4도루를 기록했다. 주말리그 후반기에는 황동재, 최준용, 전의산, 이주형 등의 쟁쟁한 동기들을 제치고 부산·제주권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10라운드가 모두 끝날 때까지 이름이 불리지 못했다. 코너 내야수치고는 아쉬운 신체 조건과 타격에 비해 완성되지 않은 수비 때문이었다.
함께 고교야구를 평정한 동기들을 프로야구로 떠나보낸 고영우의 마음은 무거웠다. 탄탄대로였던 선수 생활이었기에, 처음 찾아온 실패에 대한 좌절감도 컸다. 아예 야구를 그만둘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충분히 잘할 수 있다는 주변인들의 설득과 격려를 받은 끝에, '신인 드래프트 미지명 이후 은퇴한 아마야구 선수'로 남는 대신 대학에 진학해 한 번 더 도전하는 길을 택했다. 살인적인 훈련 강도로 유명한 성균관대학교 야구부에서 4년간 약점이었던 수비를 가다듬었다. 이연수 감독과 김성근 최강야구 감독에게 '아마야구가 아닌 프로야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타격폼'을 배우며 강점인 타격도 스텝 업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KUSF 대학야구 U-리그 왕중왕전에서 타율 3위에 이름을 올린 고영우는, 이듬해 4할 5푼 8리의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졸업 학년이었던 지난해에는 19경기에서 25타점을 쓸어 담으며 타점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3할 4푼 4리의 높은 타율을 기록했으며, 22개의 안타 중 9개가 장타였을 정도로 펀치력도 빼어났다(2루타 5개·3루타 1개·홈런 3개). 장타를 위해 큰 스윙으로 타석에 임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볼넷(11개)과 삼진(15개)의 숫자 또한 비슷했다. 이 기간 동안 JTBC의 야구 예능 프로그램인 '최강야구'에 출연해 맹활약하면서 인지도까지 챙겼다.
고영우는 대학에서의 4년 동안 주저앉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타격은 괜찮지만 수비가 아쉬운 내야수'였던 자신의 가치를 '공·수 양면에서 빼어난 대학야구 최고의 3루수'로 끌어올렸다. 그 결과 김민성의 FA 이적 이후 5년째 주전 3루수를 발굴하지 못했던 키움 히어로즈의 상위 지명을 받는 데 성공했다.
대학 졸업 후 프로야구단의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고영우의 눈앞에는 무수한 물음표가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와 달리 '대학야구 최대어'라는 타이틀은 프로 무대에서 어떠한 메리트도 보장해 주지 않았다. 한편 키움의 내야 전 포지션에는 만만치 않은 경쟁자가 버티고 있었다. 2루에는 3년 연속으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국가대표 내야수 김혜성이, 3루에는 안정적인 수비를 자랑하는 송성문이 주전으로 수 년간 뛰는 중이었다. 유격수 자리에서는 펀치력이 있는 김휘집, 고영우보다 앞선 라운드에서 지명 받은 고졸 루키 이재상이 경합을 펼치는 중이었다. 고영우가 1군 멤버가 되기 위해서는 순수 실력으로써 경쟁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비집고 들어갔다. 성균관대의 혹독한 훈련 스케줄 아래서 갈고 닦은 수비 능력을 앞세워, 내야 전 포지션에서 수비를 소화하며 유틸리티 플레이어로서의 가치를 증명했다. 어떻게든 1군 로스터에서 버티는 데 성공한 이후로는 기존의 주전 멤버의 부진이나 부상을 틈타 스타팅 멤버로 출전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생애 첫 선발 출장 경기였던 4월 11일 문학 SSG 랜더스전에서 멀티 히트를 기록하며 타격면에서도 눈도장을 찍었다. 치고, 치고, 또 쳤다. 어제 경기에서는 1번 타자로 출전해 동점 적시타를 쳐내고 쐐기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내는 등 영양 만점의 활약을 펼쳤다.
고영우는 현재까지 28경기 83타석에서 3할 9푼 4리의 타율과 .927의 OPS(On base Plus Slugging, 출루율 + 장타율)를 기록하고 있다. 갓 1군에 데뷔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득점권 타율이 5할을 훌쩍 넘어갈 정도로 찬스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중이다. 과감하게 방망이를 돌리고 있지만 순출루율이 8푼 2리로, 선구안도 나쁘지 않다. 0.76의 sWAR(대체 선수 대비 승리기여도)는 신인왕 요건을 충족하는타자들 중 가장 높다. '대졸 신인' 고영우는 그 모든 '특급 고졸 유망주'들을 제치고 2024시즌 KBO리그 신인왕 레이스의 선두를 달리는 중이다.
고영우는 대학 졸업 3개월 만에 자신에 대한 모든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대졸 최대어'는 데뷔 시즌부터 프로에서도 확실히 통했다. 그의 스윙 하나하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로에 입성하지 못한 모든 대학생 야구선수에게 꿈과 희망을 선물할 것이다. 타격이 조금 모자라서, 혹은 수비가 아쉬워서 KBO리그 대신 U-리그에서 뛰고 있는 타자들이 패배 의식에 젖는 대신 '나도 대학을 졸업하면 고영우처럼...'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고영우는 지난 13일 <스포츠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신인왕 욕심이 있냐는 질문에 대해 "다른 선수를 경쟁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라면서도 "목표를 크게 잡는다면 신인왕이 될 것 같다"며 조심스레 욕심을 내보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고영우는 타율과 OPS를 각각 2푼 남짓 끌어올렸다. 그는 자신의 방망이가 얼마나 솔직한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