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 게 있어서 올스타전은 가지 못했지만, 야구학회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가겠나~! 싶더라고! 그래서 작년 말부터 꿈꿔왔던 야구학회에 다녀왔다! 야구학회는 매년 여러 대학교의 강의실을 빌려서 하고 이번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열었는데, 학교가 참 넓어서 놀랐다! 캠퍼스 안에서 마을버스가 막 돌아댕긴다;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직원분께 신청 여부를 확인하면, 이렇게 학술대회 초록집과 주차권을 나눠준다! 주차권은 쓸 일이 없었는데 직원분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네? 예? 아 예..." 하다가 받았다. ㅋㅋ
학회의 첫 순서는 선동열 전 국가대표 감독님의 '원칙, 그리고 순리 ㅡ 내 야구인생의 좌우명'이라는 기조 대담이었다. 살다살다 각동님을 실물로 이렇게 가까이 뵙게 될 줄은 몰랐다. ㄷㄷ
선동열 감독님께서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ML에서 뛰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고 청대 때의 활약 덕에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던 얘기, 해외 진출을 하고 싶어서 대학을 휴학하고 군대에 다녀오려 했는데 대학에서도 뜯어말리고 안기부에서도 졸업하고 가라고 전화가 왔다던 얘기, 일본에서 털린 얘기,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일본 리그에서도 잘 던지게 된 얘기 등등... 진짜 많은 얘기를 해주셨다.
아무래도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계실 때는 항상 선글라스 쓰고 뚱하게 앉아 계신 것처럼 보여서 그런지(?) 잘 몰랐는데, 학회에서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표정도 인자하고 목소리도 온화하시고 또 투머치토커 기질도 있으셨다! 옆에 같이 대담하시던 분께서 하나를 물어보면 열을 답하시고, 그래서 말이 너무 길어지면 대담하는 분이 중간에 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할 말은 마치고 끝내셔서 예상 종료 시각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래도 각동님이 코앞에서 자기 선수 시절 썰을 푸는 모습을 언제 또 볼 수 있겠는가?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본인 별명이 각동님인 것을 자기도 알고 있는데 팔 각도만 강조한 적은 없다고 하셨다! ㅋㅋㅋㅋㅋ
그다음으로는 캐슬린 김이라는 변호사분께서 '스포츠 웨어러블 디바이스 산업의 확산과 법적 쟁점'이라는 강연을 하셨다. 최근에 웨어러블 디바이스 산업이 엄청 발전해서 이제는 스포츠산업 분야에도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이 스포츠 웨어러블 디바이스에 대한 법제 완비도 안 돼있는 상황에서 이 기술을 통해 선수들의 개인정보를 어디까지 빼내고 또 활용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선수들의 경우 구단의 제안에 대해 거절하기 힘드니까 자신의 개인정보 제공에 대한 의사 표현도 어렵고 말이다.
그래서 해외 리그 선수들의 변호사 중에서는 아예 스포츠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웨어러블 디바이스 하면 예전에 중고등학교 체육 교과서 끄트머리에서 나오는 모습 보면서 '흐왕 나중에 안경으로 야구 보는 날도 오는 걸까?' 같은 생각밖에 안 했는데, 이런 법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
그다음 강연은 어제 가장 인상 깊게 들었던 강연 중 하나인 '대체 선수 가치산정을 통한 트레이드와 적정 연봉에 대한 고찰'이었다! 이 강연은 이태일 스포츠투아이 대표님께서 진행하셨는데,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간 NC 다이노스 프로야구단에서 일하셨다고 한다.
쉽게 요약해서 얘기하자면, 현재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돼있는 세이버 메트릭스 수치들의 경우 선수들의 퍼포먼스만 보여주기 때문에 그 선수가 팀의 승리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WINDIFF 같은 스탯을 이용해서 적정 연봉과 트레이드 가치 등을 산정한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VORPP라는 스탯이다. WINDIFF는 팀 승리확률에서 상대 팀의 승리확률을 뺀 스탯이고 이를 점수화하여 특정 선수의 승리 기여도를 쉽게 알게끔 만든 SAGWINDIFF라는 스탯이 있는데, 이를 더 가공한 VORPP를 통해 실제 트레이드 및 연봉 산정을 진행한다고 한다! NC 다이노스 구단의 경우 2013년의 지석훈, 박정준, 이창섭 ↔ 송신영, 신재영 트레이드 때, 그리고 박석민 선수의 FA 영입 때 이 VORPP를 활용한 적이 있댄다.
2018시즌 KBO리그에 VORPP를 대입한 결과이다. 타자의 경우 박병호 선수가 리그 전체 1위에 올랐고(브리검 리그 4위), 계산 결과 2018년 기준 KBO리그의 1 VORPP는 약 15만 원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박병호 선수의 활약은 15억 원의 연봉 값을 다 하고도 남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대박!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이태일 스포츠투아이 대표님께서는 5년간 NC 다이노스 구단에서 일했고 이러한 세이버매트릭스를 적극 활용한 결과 NC가 2014년부터 2017년까지 4년간 리그 최다승을 거뒀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사건 사고가 터지며 정의/명예/존중의 세 가치를 만드는 데 실패해서 행복하기만 한 게 아니라 허전하기도 했다고 하셨다. 퍼포먼스에만 집중하면 리그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퍼포먼스라는 요소에만 치중하게 되므로, 야구에 대한 수치적 즐거움도 필요하지만 인문학적인 접근도 필요하다고 한다.
흥미로운 내용의 강연이라서 그런지, 학회에 참석한 분들의 날카로운 질문도 정말 많았다. VORPP도 결국 과거의 퍼포먼스만 살펴보는 스탯이며 박석민의 FA 영입은 사실상 실패가 아니냐(대표님께서는 실패로 생각 안 하신댄다), 오늘 소개한 데이터를 ML 팬그래프처럼 대중에 공개할 생각은 없으신지(준비 중이라고는 하셨지만 학회에서 만난 키움팬 분의 말씀에 따르면 전부터 나왔던 질문이랑 답변이라고 한다..) 등등!
'야구 퍼포먼스의 향상을 위한 트레이닝'이라는 강연도 있었는데 이건 내가 잘 못 알아들었다..
또 엄청 감명 깊게 들었던 강연은 '스탯캐스트 데이터에 기반한 외인 투수 스카우팅 방법론 - 2019년 KBO 외국인 투수 스카우팅 대회 문제 접근 방법'이라는 강연이었다. 이건 어제 학회에서 유일하게 대학생이 발표한 강연이었다.
데이콘이라는 데이터 관련 업체에서 '2010년 상반기 KBO 타자 OPS 예측 대회'(비더레 같은 게 아니라 직접 수학을 활용해서 선수들의 OPS를 예측하는 모델을 만드는 대회인데 수알못이라 눈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자세한 것은 여기로)와 '2019년 외국인 투수 스카우팅 대회'를 열었는데, 그 대회에서 우승하신 분의 강연이었다.
강연을 맡은 대학생분께서는 2011년부터 2018년까지 KBO에서 활약했던 외국인 투수 57명을 그룹 A, 2019년 KBO에 온 신입 외국인 투수 13명을 그룹 B로 나눴다. 그다음 그룹 A의 투수 중 첫 시즌에 좋은 활약을 펼친 투수들(50% 이상에 든 투수들)을 '엘리트 투수'로 정의하고, 팬그래프와 스탯캐스트를 통해 이 '엘리트 투수'들의 MLB 시절 데이터를 찾아 공통된 특성을 확인했다. 그 결과 MLB에서 많은 구종을 구사할수록 KBO에서의 ERA가 낮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고, 이때의 구종은 단순히 '던질 수 있다'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스트라이크를 꽂을 수 있으며 또 얼마나 구사를 하는지도 기준으로 삼았다.
이를 토대로 자기가 스카우터였다면 한화 이글스의 채드 벨 선수와 NC 다이노스의 루친스키 선수를 스카우트했을 거라는 결론을 도출했다고 한다!
글을 통해 설명을 10%도 못해서 그렇지 정말 인상적인 강연이었고,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질문들도 엄청 짖궂었다! 투심과 포심을 하나의 구종으로 묶거나 선수들이 자신의 구종을 스탯캐스트에서 나오는 구종이 아니라고 할 경우 어떻게 되는지, 선수가 구단의 사정에 따라 불펜이나 선발로 뛰면서 변화구의 구사 정도가 달라질 수도 있는데 이를 고려해서 통계를 냈는지, 구종 개수라기보다는 변화구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한 게 아닌지, 또한 스트라이크존에 꽂을 수 있는지보다는 가장자리에 커맨드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닌지(오설리반이 생각나서 조금 공감 가는 질문이었다) 등등!
당연히 강연자분을 엿먹이겠다는 것보다는 강연이 흥미로워서 자연스레 따라 나온 질문들이었어! 그리고 어제 학회에서 만난 키움팬분이 그러는데 이 강연자분 나중에 한화 이글스 스카우터랑 명함 교환도 했다고 하신다! 대박...!
마지막에는 유정민 서울고등학교 야구부 감독님, 마해영 성남 블루팬더스 감독님, 강흠덕 야구학교 트레이너님, 그리고 안영민 학부형님이 모여서 '야구 기술 코칭의 트렌드 변화', '야구기술 전달의 이해와 시장에 대한 논의 : 데이터 및 스포츠과학 접목 사례를 중심으로'에 대해 토론을 하셨다.
마해영 감독님은 토론의 사회를 맡은 이종열 위원님께서 "선수 시절 같이 지내며 느꼈는데 고차원적이고 독특한 사람"이라고 소개하셨다시피, 진짜 보통 분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 타격 코치(장효조)에게 배울 게 없었다(자기는 초딩 때 배운 걸 프로 가서까지 써먹었다고 한다), 오픈스탠스는 한국에서 내가 제일 먼저 시작했지 않았나 싶다, 의심이 많았고 선배나 코치의 말을 무조건 따르지 않았다, 블루 펜더스에서도 나 같은 선수는 없다, (블루 펜더스를 보며) '얘들이 프로 못 가는 이유가 있구나' 싶고 내가 가르치는 것을 소화 못 하며 노력을 안 한다고 느낀다, '마해영처럼 치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자기네 팀에 오픈 스탠스 선수는 아무도 없다 등등... 범인은 눈치를 보며 한 마디도 못 할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셨다.
이외에도 이종열 위원님께서 선수가 못 쫓아가는 이론 및 방법을 가르친 게 아니냐고도 여쭤보셨는데, '선수들 수준이 다르니 그럴 수 있겠지만 영어를 잘 아는 사람은 어설픈 영어도 잘 알아듣지 않나? 코칭 문제라기보다는 코칭을 들을 준비가 잘못된 것 같다. 내 잘못은 아닌 듯하다.'라고 답하시고, 워낙 스타 플레이서였으니 선수가 못 알아듣는 이유를 모르시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내가 잘 못 가르치면 언제든 나갈 수 있는데, 안 나가는 것은 내게 신뢰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홈런 못 치는 애들에게 홈런 치라고 안 한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모든 이들과 야구 얘기를 해도 이길 자신이 있다. 어렵게 말했을 수 있지만 방법이 잘못됐다고는 안 본다.'라고 말 하시고... 본인의 방식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분이구나~ 싶었다.
그 외에도 'KBO에서 노력하는 것들 중 하나가 지도자 연수고 전국 감독들이 유정민 서울고 감독처럼만 하면 메이저 리그에 수두룩하게 간다', '(국내 코치들이)오죽 디테일하게 못 가르쳤으면 덕 레타를 찾아갔겠나. 우리나라 지도자들 참 노력 안 한다. 한심하다. 여기서 가르치는 게 만족스러웠으면 안 갔을 것이다' 등등 따끔한 일침을 날리셨다! 그리고 여섯 시에 스케줄 있다고 가셨다
사설 레슨장 문제에 대한 이야기도 오고 갔는데, 듣고 보니까 그냥 사교육 문제랑 동일선상의 문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구를 하겠다고 선수들이 몰리는 것에 비해 고교 코치들은 한정돼있으니 맨투맨 코칭이 어렵고, 경기에 나서지 못하거나 자기 자식이 프로에 갈 만한 모습을 못 보여주니 애가 타는 학부모님이 사설 레슨장에 선수들을 보낸다는 것이다..
학회 일정이 모두 끝난 뒤 경품 추첨을 할 때 사인볼 경품에 당첨돼서 박병호 선수의 사인볼을 얻었다! 뒤에 앉아있던 분께서 등번호까지 적혀있는 박병호 선수의 사인볼은 흔치 않다 하시던데, 그건 잘 모르겠고 좋아하는 구단의 좋아하는 선수 사인볼을 얻어서 너무 좋았다.ㅎㅎ
행사 이름부터 '학회'인 만큼, 하나하나가 결코 가볍게 들을 만한 이야기들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오후 한 시부터 오후 일곱 시까지 여섯 시간 동안 대학 강의(전공까지는 아니고 교양?) 연강을 들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피곤한 만큼 즐겁다! 야구계와 관련된 분들이 정말 많이 오셔서 당신이 강민호급 친목대마왕이라면 엄청난 인연을 쌓을 수도 있을 것이고(안타깝게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야구광으로서 열광할 만한 프로그램들이 잔뜩 준비되어 있다. 혹시 흥미가 있는 분들은 다음 겨울 학회에 한 번 가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