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키움 히어로즈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사실 질문이라고 하기에도 뭐 했다. '그런 팀을 왜 좋아하냐?'는 뉘앙스였으니 말이다. 별로 다른 곳에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었다. 키움 히어로즈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었다.
들으면서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울적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당시 키움은 양현종의 호투에 눌려 5대 0으로 패배중이었고, 그 전후로도 야구를 너무 못해서 이대로면 올해도 우승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들었고, 8년 전부터 들어왔던 '그 팀을 왜 응원해?'소리를 설마 2019년에도 들을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게요. 주변의 다른 친구들은 다 집 근처 LG나 두산 응원하던데, 왜 하필 언제 쓰러져서 무너져내리고 언제 해체돼도 이상하지 않을 이 구단을, 수년째 좋아하는 걸까요.
처음에는 그저 팀 이름이 멋있어서 가볍게 팬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곰과 호랑이 등등 동물 친구들이 뛰어노는 크보 동산에서 혼자 영웅이라니, 참 멋있게만 느껴졌다. 만약 수십 년만 더 일찍 태어났다면 삼미 슈퍼스타즈 팬을 자처했을지도 모르겠다.
계기는 참 어처구니없었지만, 이후에는 선수들이 점차 드러낸 영웅 본색에 반해 열혈팬이 되었다. 2013년 KIA 타이거즈와의 개막전 경기에서 보여준 화끈한 타격을 계기로 푹 빠져들었다. L - P - G 타선은 어디에 내놔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고, 이성열이나 서동욱 같은 다른 타자들도 참 잘 쳤고, 여름 즈음부터 나타나서 공수 양면에서 맹활약하던 신인 문우람이 멋있었고, '승락극장'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굳건히 승리를 지키던 손승락이 듬직하고 그랬다.
'염갈량'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염경엽 감독은 카리스마 넘쳤고, 이런 선수단을 구성한 이장석 구단주가 대단했고, 홈구장인 목동구장은 다른 구장에 비하면야 조금 작았다마는 그래도 내야석에서 불펜을 구경할 수도 있는 등 매력이 넘쳤다.
가면 갈수록 매력이 불어나는 팀이었다. 2013년에만 해도 팀 내 입지가 불안했던 서건창과 유한준이 1년 사이에 한국 최초로 200안타를 치는 2루수와 리그 최고의 우익수로 돌변하지 않나, L - P - G 트리오는 질 수 없다는 듯이 더 강해져서는 셋이 합쳐 113홈런을 몰아치지 않나, 2년 차 신인이 150km/h대 광속구를 뻥뻥 뿌려대며 불펜의 중심이 되지를 않나...
개개인의 사연이 더해져서 마치 한 편의 야구 만화를 보는 듯했다. 방출 경력이 있는 현역 군필 신고선수에서 시작해 스타덤의 자리에 오른 서건창, 피나는 노력의 결과를 히어로즈에서 꽃피운 박병호, 한 번 방출된 이후 야구와 다른 길을 걷나 싶었지만 결국 꿈을 좇아 다시 한번 야구계에 뛰어든 안태영,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무명 선수 출신 감독 염경엽 등등...
한두 명이 빠지면 팀이 굴러가지 않는 '외인구단' 같은 팀 구성으로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고, 타선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했던 투수진에 발목 잡혀 우승이 좌절되고 말았으나, 모두 하나 되어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팀에 대한 사랑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하지만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확인하기 위해 겁 없이 비상하던 히어로즈는 이후에도 번번이 좌절했고, 차츰 추진력을 잃기 시작하더니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마치 우리가 네가 생각하는 그런 팀이 아님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감독은 구단주와 심각한 트러블이 있었고, 2016년에 그 어느 때보다 무기력한 가을야구를 치른 뒤 핸드폰에 적어놓은 입장문을 낭독하고 도망치듯 사퇴했다. 구단주는 전 감독의 힘 없이도 가을야구에 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프런트 출신 인사들을 감독과 코칭스탭 자리에 대거 선임했지만, 이는 팀을 7위로 추락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자신은 횡령 혐의로 구속되기까지 하였다. 2018년에는 트레이드 뒷돈 파문과 선수들의 성폭행 연루 사건 등이 잇달아 터졌고(이는 다행히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나, 당시에는 팬들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올해에도 퓨처스팀 감독이 무면허 상태에서 음주운전을 하는 등 사건·사고가 끊기지 않고 있다.
과거 사자 군단과 한국시리즈 무대에서 맞붙었던 일당백 영웅들 대부분 사라졌다. 2014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던 스물일곱 명의 선수 중 13명의 선수가 이적했다. 계속 히어로즈에 남아있던 열네 명의 선수 중 네 명의 선수가 은퇴했으며, 2019년 현재까지 팀에 있는 선수들 또한 그때의 찬란했던 모습은 아니다. KBO리그 최초 200안타의 신기록을 세웠던 서건창은 2015년 십자인대 파열 부상 이후 수비 능력이 대폭 저하되었고, 홈런왕 박병호는 현재 잔 부상과 고질적인 손목 부상에 신음 중이다. 선수단을 이끌었던 이택근은 2018시즌 후 과거 후배 선수를 구타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더 이상, '그때 그 시절의 도깨비 군단' 히어로즈는 없다. 선수단은 너무 많이 바뀌었고, 새로운 홈구장 고척 스카이돔은 지붕이 있다는 점을 빼면 단점투성이 구장이고, 여전히 우승은 요원하고, 사건사고는 숱하게 터져서 팬들을 속상하게 만들고 그렇다. 2017년에서 2018년 사이에 탈덕한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고, 나 역시 2017년 겨울에 박병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어로즈는 여전히 '히어로즈'이다. 몇 번의 사건·사고가 터지고 몇 명의 선수들이 이탈해도 영웅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온갖 사나운 외풍이 불어와도 묵묵히 자신들의 할 일을 해냈고, 그 결과 1년 만에 다시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앞으로도 종종 회상될 명승부를 연출했다. '넥센'이라는 이름을 걸고 치른 마지막 가을야구에서 팬들을 몽땅 울려버린 뒤, 작은 성과에 자만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확인하러 가기 위해 분전 중이다.
일당백 영웅들의 빈자리를 다른 영웅들이 등장함으로써 메꿔냈다. 괴물 신인 이정후와 역대 최고의 외국인 타자 제리 샌즈가 차례대로 등장하며 외야진은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강해졌다. 유격수 포지션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이며 '평화왕' 칭호를 얻었던 강정호가 미국으로 떠나자, 곧바로 김하성이 폭발하며 2대 '평화왕'이 되었다. 비록 혼자서 3인분 몫을 하던 밴 헤켄은 은퇴했지만, 이제는 제이크 브리검과 에릭 요키시, 그리고 최원태가 창단 후 최고의 쓰리펀치를 구성하고 있다.
혹사 끝에 망가졌던 조상우와 한현희는 부상을 털고 재기에 성공함으로써 투수진에 힘을 보태고 있으며, 심지어 오주원은 선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놓은 강직성 척추염을 극복하고 1점대 마무리로 군림했다. 박병호와 서건창은 부상 속에서도 홈런 1위와 3할 타율(.309·리그 15위)을 기록 중이다.
살덩이가 썩어서 괴로운 통증으로 다가와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썩어 문드러진 살점이 떨어져 버리면 다시 새살이 돋아나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사방에서 돌덩이를 던져도 꿋꿋이 견뎌낸다. 언제 쓰러져서 무너져내리고 언제 해체돼도 이상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쓰러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다. 나는 이렇듯 히어로즈가 고난과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기어이 이겨내는 모습을 사랑한다. 그리고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하나 없다지만 히어로즈는 선수단뿐만 아니라 코칭 스탭까지, 유독 이야깃거리가 많은 점 역시 사랑한다. 각자의 이야기를 가슴속에 품고 하나의 목표를 위해 장애물을 헤쳐나가며 달려 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영웅들'이다. 나는 이런 영웅들이 모인 히어로즈가 끝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해피엔딩을 맞는 모습을 기대한다.
+) 선수단과 구단 관계자들도 많이 힘들고 지쳤겠지만, 지난 몇 년간 온갖 사건사고를 지켜봐 왔던 팬들도 정말 많이 지치지 않았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올 시즌 내내 우승 적기를 외쳐댔던 것은 어쩌면 영웅들이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일지도 모르겠다. 제발... 올해는 우승 좀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