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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성실 Jul 28. 2019

클로저 이상용, 그리고 클로저 오주원

(사진 출처 : 네이버 북스)

  클로저 이상용이라는 야구 만화가 있다. 빨라봐야 130km/h 후반대의 공을 던지는 평범한 우완 투수가, 주전 마무리의 부상을 틈타 1군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고 팀의 가을야구를 이끈다는 내용이다. 전체적인 스토리는 그야말로 '만화 같다'는 말이 어울린다. 하지만 마치 KBO리그 하위권 팀들의 모든 문제점(무능한 프런트, 정치질 하는 코치, 뭉치지 못하는 선수단 등)을 섞어놓은 듯한 프로야구단 서울 게이터스는 만화를 읽는 팬들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상용의 소속팀은 신생팀 매드독스에게 밀려 정규시즌 최하위에 머무른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주전 포수와 마무리 투수가 부상으로 이탈하며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지만, '맡을 사람이 없어' 마무리 자리를 차지한 이상용이 매 경기마다 호투하면서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상용을 중심으로 선수단이 변화하고 감독이 자진 사퇴하는 등의 희생을 치름으로써 프런트의 음해공작이 억제된 끝에 서울 게이터스가 기나긴 암흑기에서 탈출하는 모습은, 독자가 과거 자신의 응원팀이 찬란히 빛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전율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상용을 2군 마무리로 기용해보는 것이 어떻냐는 코치의 말에 딱잘라 거절하는 게이터스 2군 감독.  이후에도 계속 부정적인 의견을 내보인다. (사진 출처 : 스포츠 동아)



이상용은 마무리 보직을 제안하는 투수 코치에게 자신이 최악의 마무리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마지막 순간까지 팬들의 비난을 받기도 한다. (사진 출처 : 스포츠 동아)



아마추어 시절까지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스스로의 공을 봐왔기에, 자기 공이 별로임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용은 몰릴지언정 도망가지 않는다. (사진 출처 : 스포츠 동아)



최악의 마무리라고 비난받을지언정, 믿어주는 이들이 있었기에 마지막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서울 게이터스의 10년만의 4강진출을 확정짓는다. (사진 출처 : 스포츠 동아)

  재난 블록버스터물을 본 사람이 하룻밤 정도는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닥치지 않을까 하며 잠자리를 설치듯, 글쓴이 또한 이상용같은 투수의 등장을 기대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이런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고, 만화가 완결된지도 어느덧 3년이 되었기에 가슴 한구석에 묻어뒀다. 하지만 야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화 같은 스포츠였다.




신인왕을 차지했던 2004년, 평범한 선수로 전락해버린 2012년. (사진 출처 : OSEN, 스포츠 동아)

  청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대 유니콘스에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아 입단한 2004년, 10승 9패 평균자책점 3.99를 기록하고 한국시리즈에서도 호투하면서 신인왕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듬해 스프링캠프 때부터 갑작스레 생긴 허리 통증으로 신음했고, 미국에서도 검사를 받아보는 등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끝내 통증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몸상태가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좌완 에이스를 꿈꾸던 19세 신인은 이듬해 22경기에 나서 6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처참히 무너졌고, 그 다음해에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어느덧 자신의 자리는 장원삼, 이현승 등의 투수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남은 길은 군입대밖에 없었다.


  입대 전까지만 해도 가세가 기울어질지언정 무너지지는 않았던 소속팀이 제대를 하고 나니 공중분해돼있었다. 이듬해에는 현대 시절 팀을 지탱하던 좌완 3인방이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타 구단으로 이적했다. 차세대 에이스에서 불펜 요원으로 전락했지만, 아랑곳 않고 꿋꿋이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원인 모를 통증이 괴롭혀 제 기량을 모두 펼칠 수 없었다. 2012년에는 팔꿈치 통증으로 토미 존 서저리까지 받았고, 2014년에는 발목 통증이 찾아왔다.

  팀이 창단 후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2014년 포스트시즌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은 뒤, 통증이 한꺼번에 몰려오며 병상에서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고통을 겪었다. 그때가 돼서야 강직성 척추염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척추 관절에 관절염과 관절통이 오며, 더 진전되면 척추가 굳어 움직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질환. 힘든 치료 끝에 이듬해 말에는 다시 마운드 위에 설 수 있었지만, 찬란했던 신인 시절을 생각하면 원인도 모르고 고통받았던 지난 10년은 너무 뼈아팠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그로부터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85cm의 장신을 활용해 140km 중후반의 빠른 공을 내리꽂으며 '잘만 다듬으면 150km/h대의 강속구도 뿌릴 수 있을 것'이라는 평을 받던 고졸 신인은, 이제 사이드암과 스리쿼터 사이의 특이한 폼으로 130km대의 공을 던지는 30대 중반의 베테랑 투수가 되었다. 지난 시즌에는 좌완 투수가 부족한 팀 사정상 필승조로 뛰었으나, 6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였다. 시즌 초반 두 경기에서 1.1이닝 1피안타 3볼넷 2실점으로 부진한 이후로는 아예 추격조로 활용됐다. 4월부터 5월까지 두 달간 18경기에 나서 0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나 그를 신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와중 150km/h 후반대의 광속구를 던지는 주전 마무리투수가 전치 4주의 부상을 입고 말소당하자, 감독은 추격조로 활용되던 '왕년의 신인왕'을 임시 마무리로 내세웠다. 방어율이 낮은 점을 들어 일말의 기대를 품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뜨악하는 사람들 역시 많았다. 바로 직전해에도 비슷한 흐름으로 불펜이 붕괴된 바 있었기에, 모두가 숨죽여 지켜봤다.



6월 12일 마산 NC전, 10회 동점상황에서 마무리투수로 올라와 시즌 첫승을 올린 오주원.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그리고 '임시 마무리'는 자신의 역할을 149% 수행해냈다. 마무리 직책을 맡게 된 첫 경기부터 연장 10회 말에 1점 차라는 타이트한 상황에서 올라와 상대팀의 상위타선을 상대했고, 삼진-땅볼-뜬공으로 잡아내며 깔끔하게 경기를 끝냈다. 바로 다음날에도 경기가 팽팽해지면서 연장 10회말 동점 상황에 올라와 4번타자 양의지를 상대해야만 했다. 결과는 1이닝 1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이었고, 11회초 타선이 점수를 내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후에도 몸쪽으로 과감히 130km/h대 공을 던지는 '임시 마무리'의 활약은 계속됐다. 처음 마무리 투수로 올라온 6월 11일부터 올스타 브레이크 때까지 14경기에 출장해 14이닝을 소화했고,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으며 12세이브를 올렸다. 피안타율이 1할대여도 굉장한 수치인데, 이 기간 동안 피OPS(출루율+장타율)이 1할대였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제발 오늘도 무사히 9회가 지나가길'하고 기도하거나 '왜 저런 투수를 못 터냐'며 분해했다. 그러든 말든 팀은 오히려 기존의 마무리투수가 9회에 올라올 때보다 불펜이 견고해졌고, 경기 후반 역전패를 당하는 일이 거의 없이 상승세를 타며 전반기를 2위로 마무리했다.


  키움팬들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오주원의 이야기이다.



(사진 출처 : 스포츠동아)

  다시 '클로저 이상용'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야구 만화 속 주인공들이 으레 그렇듯,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이상용도 위기를 겪는다. 주인공 이상용은 마무리로 기용되기 시작한 지 여섯 경기만에 블론 세이브를 범한다. 팀이 한 점 차로 앞서있는 9회말 무사 1루의 상황에서 등판해, 상대팀의 4번타자에게 끝내기 투런포를 허용하고 만다. 오주원과는 달리 과거 신인왕을 수상한 것도 아니고 몸이 아파서 구속이 떨어진 것도 아니며, 그저 실력이 부족해 10년을 2군에서 보내다가 올라온 '똥볼러'의 블론 세이브다.

  그러나 감독은 이상용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으며, 동료 선수들 또한 접전 끝의 패배에 좌절하기보다는 "무실점 노블론으로 시즌을 끝낼 생각이었던거 아니지?"라고 말하며 이상용을 격려한다. 결국 이상용은 1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26세이브를 올리며 팀의 10년 만의 가을야구를 지키는 데 성공한다.



(사진 출처 : 키움 히어로즈 공식 홈페이지)

  지난 26일 고척 NC전에서 오주원이 시즌 첫 블론 세이브를 허용했다. 선두타자 박민우에게 안타를, 스몰린스키에게 사구를 허용한 뒤 박석민에게 동점 쓰리런을 얻어맞았다. 다행히 팀은 9회말 1사 3루 상황에서 상대팀 투수 임창민이 던진 견제구가 3루수 뒤로 빠지며 시즌 첫 끝내기 승리를 거뒀지만, 직전 경기 때도 2개의 안타를 맞으며 불안하게 세이브를 올렸기에 불안감이 조성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26일 경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설마 시즌 끝날 때까지 블론 안 할 생각이었어?"

  27일 경기에서도 키움 히어로즈가 9회초 1대 4로 앞섰고, 마운드에는 또다시 오주원이 올라왔다. 전날 오주원이 안 좋은 모습을 보이며 강판된 이후 기존의 마무리투수 조상우가 1이닝을 깔끔히 막았기에 다소 의아하기도 했던 결정이었다. 감독의 믿음이 무색하게도, 오주원은 마운드에 올라오자마자 안타와 사구로 1사 만루의 위기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정석 감독은 투수를 교체하는 대신 마운드에 올라와 격려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오주원은 모창민을 1-2-3 병살타로 잡아내며 시즌 13번째 세이브를 올렸다. 그야말로 만화 속 한 장면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광경이었다.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 오주원의 활약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까. 어쩌면 지금의 부진이 장기화되어 다시 조상우에게 마무리 자리를 뺏길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주원의 활약은 팬들의 가슴속에서 그 어떤 야구만화보다 만화 같은 모습으로 남을 것이다. 이왕이면 올시즌 키움 히어로즈가 우승을 거두며 '2019년 키움 히어로즈'라는 만화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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