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게임 업계로 비춰보는
이제 마케팅은 작은 단계에서부터 점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막대한 시장장악력과 예산을 보유한 기성 대기업은 제외. 하지만 그 역시 신규 프로덕트에 관한 마케팅에서는 예외가 없다. PC게임의 몰락을 보자. PC게임은 고원가상품이다. 기획과 개발과정에서의 R&D 포함 높은 인건비까지 충당하자면 준비비용이 매우 높은 편이다. 그러다 보니 수지타산을 고려하면 출시 후 달성해야 하는 매출 압박도 커진다. 물론 일정궤도에 올라서면 높은 유저 리텐션으로 그간의 투입비를 크게 상회할 만큼의 매출을 발생시키곤 하지만 경쟁이 극심한 분야인 만큼 국내에서 "중박"도 보기 힘들어졌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또 하나 큰 부담요소는 출시까지 걸리는 시간인데 라이브까지 최소 2년 이상을 준비하다 보니-경우에 따라 더 길어지곤 한다-자칫 해당기간 시장이 변하고 흐름에 유연히 대처하지 못한다면 게임사는 큰 매몰비용만 떠안게 되고 만다. 자연스레 게임사는 PC게임 개발과 유통을 조심스러워하게 됐고 통신기술발전과 함께 게임시장권력의 중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시간이 투입되는 모바일 플랫폼으로 이전됐다.
그럼에도 PC게임 업계 마케팅 방식은 일변도였다. 게임출시와 함께 전방위적 마케팅이 한꺼번에 휘발되는 방식말이다. 마케터는 출시일이 확정되면 디데이에 맞춰 각종 광고 매체를 예매하고 출시 전날까지도 유저 맞이 준비에 여념이 없는 나날을 보낸다. 제품이 출시되고 TV를 비롯한 온라인과 옥외 매체에 광고가 게시되기 시작하면 마케터는 "그간의 준비과정은 험난했어도 성공적 마케팅을 내심 기대"하고 시나리오에 따라 광고에 담긴 메시지에 화답하는 고객을 상정한다. 그렇지만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실패는 예견된 것일지 모른다. 출시 전까지 제품을 꽁꽁 싸맨 채로 기대감만 높이는 데 집중하였지 제품이 시장과 소비자 요구(니즈)에 얼마나 부합하고, 부합한다면 니즈의 크기는 정량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부합하지 않는다면 경쟁 제품군과 비교해 어떤 부분에서 얼만큼이 부족한지 실질적인 경험으로 이를 따져 본 횟수가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PC게임 업계에 약칭 "CBT(Closed Beta Test)"로 불리는 비공개 시범 테스트가 존재하나 이 또한 언제부터 출시 전 마케팅의 일환으로써 혹은 관행적으로 실시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3일~5일 간의 단기 테스트로는 콘텐츠의 지속성과 유저 리텐션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불가할 뿐 아니라 함께 편성되는 적은 광고 예산으론 어떤 온라인 지면으로부터 유입된 트래픽이 건전한 것인지 (모수가 적어)정확한 관측도 불가하다. 즉, 본격적인 매스 마케팅 돌입에 앞서 검증이 필요한 "제품시장궁합(Product Market Fit, PMF)"에 대한 개념이 보편화돼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PC게임 시장에서도 일정수준의 개발비를 초과하기 이전에 시제품의 개념처럼 적은 비용으로 가볍게 선보일 수 있는 테스트 시연 버전을 시장에 배포하거나 혹은 이러한 시도를 장려하는 사내 문화가 정착되었다면 어땠을까. 마케팅 수단 혹은 관행으로써의 테스트가 아닌 온전히 게임의 Go/Stop을 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써의 테스트가 출시 훨씬 이전 단계에서 보다 개방적/장기적으로 실시되고 여기서의 피드백을 철저히 분석해 게임의 장래를 보다 근사하게 점쳐볼 수 있었다면-물론 발 빠른 수정과 거듭된 검증 작업을 위해서 높은 개발역량은 필수 전제조건일 것이다-향후의 손실을 줄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론칭 마케팅 방향과 규모를 더욱 정밀하게 설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lean하게"란 표현을 많이 접하곤 하는데 불확실성 속에서 생존하는 스타트업 문화가 낳은 용어이다. 자의적으로 풀이하면 "완벽히 갖춰진 서비스 혹 완제품은 아니지만 시장의 반응만 검증할 수 있는 수준으로써 프로토타입만 준비되면 그것으로 테스트해보고 시장/잠재고객 반응을 보자"는 의미에 가깝다. 그렇게 시장에 서비스/제품을 살짝 걸쳐놓은 채로 입질이 오는 지 보다가 긍정적 시그널이 전해지면 그 방향으로 사업을 더 경작해 나가고 반대라면 개선하든가 접든가 하여 손실을 최소화하는,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은, 상식적 개념이다. 이 방식은 앞서 말한 PMF를 단기간 검증하는 최적의 방도로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확산돼왔고 이를 확인하는 수단인 프로토타입에겐 "최소존속제품"이란 명칭도 붙여졌다. 핵심은 이제 PMF를 검증하는 단계부터 마케팅이 개입하고 시작돼야 한다. 원기옥을 모아놨다가 빵 터뜨리려는 접근이 아닌 상품 초창기부터 차근차근 점층적으로 해당 제품이 마케팅을 할 만큼의 시장성을 가졌는지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이후 마케팅 예산과 방향성은 제품의 정치적 위상과 준비기간에 무조건적 비례해 결정될 게 아니라 철저히 검증된 PMF 지표에 따라 조율돼야만 한다. 뭐 어쨌거나 마케팅의 시작은 그래서 작아져야 한다. 육안으로 보아도 상품이 몇 시대를 앞서나갈 정도의 혁신성을 갖추지 않은 이상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케팅은 PC게임 마케팅처럼 점강적 추세를 보인다. 초반엔 많은 자금을 날려버리고(안 되는 걸 깨닫고) 점점 그 규모를 줄여나간다. 게임 마케터로 있었던 시간 그리고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이 모든 생각의 출처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생각은 이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