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고등)부 장려-이보리
우리 가족이 아프리카 케냐에 살 때 엄마는 유치원 선생님이었죠.
내가 중국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때도 엄마는 중국 대학생을 가르치는 한국어 선생님이었어요. 우리
집에서 대학까지 거리가 멀어서 일을 그만둘 줄 알았지만, 오히려 엄마는 수업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 주셨죠. 중국 학생이 서울대에 합격하거나 베이징 시내에서 학생들과 한국 치킨집에 간 이야기
둥 에피소드가 넘쳐났죠. 나는 엄마가 선생님인 것이 자랑스러웠어요. 나도 엄마처럼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중국에서 현지 학교에 다니던 때가 생각나요. 학비가 비싼 중국 국제학교에 다니는 한국 친구들을
부러워했어요. 나도 멋있는 국제학교에 다니고 싶었거든요. 중학교 3학년 때 우리나라로 건너와 공부하며
결심했어요. 국제고등학교에 가야 한다고 졸랐죠. 우리 집의 어려운 형편보다 내가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했거든요. 나의 꿈은 국제학교에서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만나며 미래에 우리나라의 문화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엄마는 씨앗처럼 작은 나의 꿈이 언젠가 나무가 되고 미래에 숲이 된다는
희망으로 무리해서 국제학교에 보내주셨죠.
엄마는 우리나라에서 한국어 교사의 일자리 찾는 게 쉽지 않아서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친구들이 엄마 직업을 물으면 창피했어요. 진실을 말할지 상상속의 멋진 엄마를 말할지 고민하다가
선생님이라고 했죠. 포항의 학교 기숙사에서 엄마에게 전화 걸어도 받지 않을 때가 많았어요. 통화해도
목소리가 천 개의 밤을 지나온 것처럼 지쳐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엄마가 내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했어요.
중국에서 대학생을 가르칠 때, 엄마 얼굴은 반짝반짝 빛났어요. 요즘 엄마 목소리는 피곤함만 가득하죠.
한국어에 관해 물으면 "지금 일하는 중이니까 유튜브 찿아봐" 라고 말했죠. 화가 났어요. 한국어 시험의
낮은 점수를 엄마 탓으로 돌렸어요.
내가 힘들 때 전화해도 위로를 받을 수 없어서 속상했어요. 기숙사 친구와 싸웠고, 운동하다가
다치기도 했어요. "엄마 보고 싶어." 라는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지만, 끝내 하지 않았죠. 전화기 너머는
늘 조용했어요. 엄마 이름을 몇 번씩 불러도, 겨우 "응···" 하는 잠긴 목소리만 들렸죠.
휴대전화를 던저버렸어요. 두 팔로 몸을 감싸며 웅크렸어요. 내 모습이 감정이라는 색깔로 가득 찬
작은 공 같았어요. 분노, 실망, 슬픔, 상실감 같은 감정이 덩굴처럼 내 마음 깊은 곳까지 휘감았어요. 덩굴은
마치 바싹 마른 흙을 파헤치듯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손 같았어요.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죠. 먼지조차도.
언젠가 엄마의 손을 봤어요. 여기저기 데인 자국들. 순간, 내가 화냈던 모든 이유가 비에 젖은 종이처럼
무너져 내렸어요. 손이 화상 자국으로 뒤덮인 이유를 물었더니 햄버거 굽다가 그랬다고 했죠. 모두 잠든
시간에 일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너를 위해서" 라고 엄마가 말했어요. 나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어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눈물은 피부를 스치며 뜨겁게 흘러내렸지만, 아프거나 따갑지
않았죠. 어떤 자국도 남지 않았고 상처조차 없었어요.
용기 내어 진심을 말했어요 " 내가 부끄럽고 미안해. 엄마의 희생에도 나는 시험 망친 걸 엄마 탓을 했어요.
내 미래와 행복과 공부를 위해서요. 나는 실패할 수 있고, 엄마가 바라는 딸이 될 자신도 없어요" 라는 말에 엄마는
괜찮다며 그저 내가 좋아하는 걸 찾고 그걸 따라가면 된다고 하셨어요.
나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게 어려워요. 고집 세고 뭐든 내 방식대로 하려고 하죠. 그런 나를 16년
동안 키우느라 힘들었죠. 미안해요. 앞으로 받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엄마의 노력과 희생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딸이 되고 싶어요.
엄마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별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도, 태양이 떠오르는 것도
엄마가 있기 때문이죠. 내가 존재하는 이유도 엄마예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엄마의 딸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엄마의 사랑하는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