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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르시 Jul 26. 2022

가난의 대물림

미안해 아가야

가난한지 모르고 살았다.

굳이 엄마는 누군가의 삶과 우리의 삶을 비교하지 않았고

생각이 그리 크지 않았다.


스무살 중반때쯤 가난한거였구나 그때서야 알았다.


20대 중반까지 새옷을 거의 사지 않았다.

엄마의 지인분에게 계속해서 물려받았다.

그게 좋았다. 좋은 옷들이 많았다.


중학교 도시락엔 항상 김치만 있었고

깨끗하게 씻기지 않은 도시락 가방엔 구더기가 기어다니기도 했다.


생리를 시작할땐

매일 일하느라 집에도 엄마가 없고 언니들과 소통도 그닥하지 않고 있었기에

그냥 옷에 새어나오는게 무서워서 휴지를 돌돌 말아서 생리대를 대신했다.


집 내에 화장실은 없었고

저녁엔 화장실 가기위해 밖에 나가는게 무서워서

요강에 했고 혹은 화장실 없는 씻는곳에서 쉬를했다.

그게 익숙했기에 간혹가다 길을 가다가 화장실이 먼듯하면 주차된 공간 옆에 틈에서 쉬를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떄까지 그랬던것 같다.




더 공부를 하고 싶어서 편입한 학교에서

기숙사비와 생활비 그리고 학자금 대출에 대한 이자와 원금을 갚기위해

일주일간 3가지 알바를 했다. 그래야 밥을 먹을 수 있었고.. 그래야 전공책을 살 수 있었고

그래야 학자금 대출과 원금을 갚아나갈 수 있었다.

새로운 옷을 사는것은 사치였다.


대학 방학식날은 친구들이 기숙사를 퇴실하면서 꽤 많은 옷들과 쓰레기들이 나온다.

내가 보기엔 쓸만한 옷이 있기에 주워서 입었다.


아차,

그 주웠던 옷 주인과

다음학기에 룸메이트가 되었다.

자기가 버린옷이랑 너무 비슷하다고... 난 당황하여 둘러되었지만 상대방은 이미 알았을것이다.


그리고 그 언니가 캠퍼스 생활하다가 주말에 집가면 엄마가 밥해주지 않냐며 물었던 얘기..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평일과 주말 항상 바쁘셨기에..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고 계란후라이를 하고 김을 꺼내서 항상 먹는게 익숙했고 당연해서..

그렇지 않다고 하니..어머? 너 오랜만에 가는데 엄마가 안반겨주셔? 이상하네.. 했던말

암튼 몇몇가지 에피소드로 난 환경이 다르구나 깨달았다.




전문대 졸업후

4년제 편입.

편입한 곳의 친구들은 똑똑했다.

운이 안좋아서 수능 망쳐서 그 학교온 아이들이였다. 그 말을 달고 산 친구들이 많았는데..

말만 그렇다고 처음엔 생각했는데.. 졸업후 의대를 간 친구들도 많은것보면.. 그 친구들의 말이 근거없는 말은 아니긴했다.


암튼, 그런 친구들과 난 경쟁해야했다.

영어와 수학이 부족했다.

그리고 생활기반인 돈이 부족했다.


생활기반을 만들기 위해 일주일에 3가지 알바를 병행했다.

학교근처 식당알바, 학교내 구내식당알바, 학교내 근로학생.

이렇게 3가지를 병행해야 버틸 수 있는 생계였다.


공부엔 자신이 없었기에 몸을 쓰는 알바를 주로 했다.

친구들 공부할때 알바했고

친구들 잘땐 공부를 했다.


잠을 줄이며, 약2주간 미친듯이 시험기간엔 밤을 지새우며 공부하기도 했는데

역부족이였다. 뒤에서 2등을 했다.

매일 수업시간 맨앞에 앉고

과수석 오빠가 필기한 노트도 보여주고

2주간 밤을 지새며 공부했는데도 뒤에서 2등한 내 자신을 보고 너무 한심했다.


난 안될것 같다는 생각에

일주일간 수업을 나가지 않았다.

중간 시험도 있었는데 시험도 보지 않았다.


고맙게도 그 과수석오빠가 내가 안되어 보였는지..

교수님께도 말씀드려서 시험을 다시 볼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다시 강의실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공부가 너무 어려우면 질문하라고 조교선생님도 붙여주셨었다.


일주일간 출석하지 않다가

강의를 들으려니 더 못따라가겠어서

미칠것 같아서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하염없이 계속 울었다.

너무 바보같아서 난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절망스러워서 울면서 수업을 들었다.


그래도 졸업은 했고

졸업장은 땄지만

겨우 따서 자신감 없는 졸업장으로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엄마 내일 어린이집 안가면 안돼?'

'어린이집 가기 싫어'


어린이집에 잘 다닌 아이였는데

갑자기 잠들기전 이리저리 짜증을 내다가

저 말을 한시간 동안 내뱉는다.


너무 너무 가기 싫은가보다.

내가 전업주부였다면.. 그런 아이를 하루쯤 같이 놀며 방학처럼 보내줄텐데

방학인데도.. 가야하는 아이가 가엽고 미안했다.


조금 더 안정적인 직업의 남편을 만났다면

아이가 너무 힘들어할때 내가 쉬면서 아이케어해주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은 프리랜서이기에 일이 없을떈

아이를 조금 일찍 데려와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는 남편이 밉기도 했다.


한명이라도 한쪽이라도 300만 번다면 한쪽 쉬고 아이케어하면 좋겠는데

둘이 열심히 벌어야 300대가 겨우 되는 우리의 형편이 참 가난하다고 느꼈고

아이에게 미안했다.


부모의 가난으로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오랜시간 어린이집에 있어야 되는게 미안했고

부모와의 교류도 더 적을 수 밖에 없는게 미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모두 건강해서 감사하고

아이가 가기 싫다고 표현했을때 내가 들어줄 수 있어 감사했다.


최저임금의 급여지만 그래도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어서 감사하다.



초중고등학교땐 공부에 그닥 관심이 없었고

대학교땐 생계를 꾸리는게 먼저였기에 공부는 나중이였다.

결혼후에도 생계를 꾸리는게 먼저이기에 미래에 대한 공부는 나중이 되는 상황이다보니

계리직도 그 꼴이 난것 같다.


반복된다.

악순환이 대학교때와

결혼한 지금 반복된다.


끊어내고 싶다.

어떤 생각의 고리때문에 난 지금 반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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