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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서 May 07. 2018

산다는건 말썽을 부리는 일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산다는게 곧 말썽이예요."


지난주 금요일에 저희 반 영찬이가 작은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새벽 4시 30분 후배와 함께 기숙사를 탈출해 식당으로 가 봉지라면을 끓여먹은겁니다. 사실 한참 먹성 좋을 나이인 19살인걸 감안하면 고개가 끄덕여질 일이지만 교칙은 교칙인셈이지요. 영찬이에게 새벽에 먹는 '짜왕'은 꿀맛을 넘어 일종의 '추억 맛' 또는 '자유 맛'이었을 겁니다. 걸리지나 않았으면 좋으련만 허술한 그 아이는 사감 선생님께 딱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벌로 집에 가는 날 반납(기숙학교)하고  학교에 남아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추억과 자유의 맛을 느낀 대가는 학교에의 구속이었군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씨는 말합니다. "산다는게 곧 말썽이예요." 

물론 이 말이 나온 맥락은 '산다는 것'의 철학적인 물음과는 다른 다소 민망한 대목이지만, 어쩌면 65세쯤 되는 조르바씨의 모습이 19살 영찬이와 겹쳐보이는 것은 둘에게 자유로움의 동일함을 느낀 탓일 겁니다. (온 몸으로 현재를 살아내는 순수함일까요?)

조르바씨에 말에 따르면 영찬이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기숙사의 답답함보다 즉흥적으로 밤바람을 쐬고 배가고파 라면을 먹었지요.

그래서 '먹물'인 저는 온 몸으로 세상을 만나는 영찬이에게 보답을 해주고자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주말 하루를 반납하여 봉사활동중인 영찬이를 데리고 아침부터 대둔산을 다녀왔습니다. 벌받고 있는 제자와 휴일을 반납한 채 함께 산을 가는 담임이라니...... 낭만적이지 않나요? 하지만 현실은 곧 죽을 듯 헐떡이는 담임과 그걸 보고 깔깔대는 19살 축구 고수 영찬이입니다. 살아있다고 제 몸도 온통 말썽인가 봅니다. 그리고 이 몸상태가 저의 현재겠네요.


"쌤은 힘든데 웃기냐?"한마디에

"네! 오늘 재밌어요. 쌤의 새로운 모습을 봤어요."


새로운 모습이란 뭘까요? 곧 임종할 것 같은 담임의 모습? 그러나 교실이라는 장면을 지나 새로운 곳에서 마주치는 관계는 새롭긴 합니다. "가방 제가 들어드릴게요."라고 말하는 영찬이가 엊그제 기숙사를 탈출한 영찬이가 맞는지 새삼스럽기도 하고요. 


우리는 교육과정에서 '인물, 사건, 배경'을 소설의 구성요소로  배웁니다. 어떤 인물이 무슨 배경 안에서 '사건'을 일으키는 것. 그게 소설이지요. 조르바가 말하는 말썽은 소설로 하면 갈등과 같을 겁니다. 말썽이 없다면 삶에서 무슨 '일(사건)'이라도 있을까요. 내가 써 나가는 자서전에 고민과 갈등은 삶이 풍부하다고 말해주는 일일겁니다. 영찬이는 봉사활동이라는 작은 대가를 치렀지만, 그것에 더해 하루 동안 스스로와 저에게도 소설같은 하루를 선물해 주었군요.


'이건 괜찮을까? 저렇게 해도 되는걸까?'하는 마음 속의 저울은 던져두고 일상 속에 즐거운 말썽을 한번 부려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마치 며칠전 어린이날을 보낸 어린이처럼 말입니다.


조르바가 다시 저에게 말을 합니다.

"산투리*는 연주를 하고 싶을 때 할 거요. 알겠어요? 하고 싶은 때 할 거라고! 일이라면 당신이 시키는 대로 노예처럼 하겠소. 산투리는 사정이 달라요. - 이놈은 짐승 같아서 자유가 필요해."

*산투리 : 그리스 전통 악기


제가 교사라는 직업을 사랑하는 이유는 철없는 조르바를 만난 기쁨처럼, 매일 철없는 아이들과 깔깔대는 것이 저에게 자유와 말썽을 가져다주기 때문일겁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한구절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는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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