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 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시지프스 신화를 아시는지요. 그리스 신화 속에서 끝없이 산꼭대기로 바위를 올리는 형벌을 받은 이야기를 말합니다. 무거운 바위를 굴려 산 위에 올려놓으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그러면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바위를 굴려서 올려야 합니다. 이런 행위는 언제 끝이라는 기약 없이 반복됩니다. 이 형벌의 무게는 무엇일까요? 계속 무거운 바위를 굴려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것보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진짜 형벌일 것입니다.
2013년 여름이었습니다. 전국 국어교사 모임의 저녁 회식자리였습니다. 선생님들의 이런 저런 대화가 오가는 곳에는 언제나 아이들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막막함과 답답함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지요. 그때 한 선생님께서 이 시지프스 신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교사란 끝없이 산 위로 돌을 굴려 올리는 존재이고 교육이란 그런 것 같다고요.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다시 반복하여 말해야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원상복귀되어 같은 실수를 하는 아이에게 또 같은 말을 하고...... 그야말로 반복의 연속입니다. 어떨 때는 아이가 변하기는 하는지 스스로 무력감을 느끼게도 됩니다. 반복이 당연한 직업이고 그게 곧 교사의 일이라는 거지요. 막막하던 차에 그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는 꽤 적절한 위로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라면 과연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사는 농부지만 열매를 맺을 생각 보다는 그저 씨를 뿌리는데 만족을 하는 느낌이랄까요?
2년 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2013년 여름밤의 이야기가 저 책을 고르게 만들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부조리한 삶이 주는 희망에 대한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책은 말합니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교사가 깨어 있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끝없이 반복하고 또 그러할 의지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깨어 있는 의지가 반복되는 부조리의 삶 속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때 반대로 행복을 만나는 것이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돌을 굴려야 하는 것이 당연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굴릴 의지를 발휘하는 것. 그게 깨어있는 교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된다.”
씨를 뿌리는 농부로 그치는 데 만족해서는 안될 거라 생각합니다. 아이의 변화와 스스로의 변화를 행복으로 두고 마음에 그려보아야 합니다. 그게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발견하는 행복일 겁니다.
부조리한 삶. 아마도 교육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의 삶이 그러할 것입니다. 심지어 개인의 마음조차 어떨 땐 부조리하다고 느끼듯 말입니다. 그러한 삶을 향한 깨어있는 의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을 그림으로 만들어질 거라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