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연수는 산문집 <시절 일기>에서 쓰다 만 소설과 끝을 맺은 소설의 결정적인 차이는 처음 구상에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고 밝혔다. 언뜻 생각하면 대폭 수정된 원고를 끝맺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같지만 실상은 반대다. 큰 틀을 바꾼 원고들이 주로 완성되었고 출판까지 이어진 반면, 그렇지 못한 원고들은 미완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미완으로 남은 작품은 주로 작가 생활 초기에 많이 쓰여졌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시사점이 매우 많은 말이다. 애초의 구상이 처음과 달라지는 이유는 처음 생각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생각이 어떤 완전하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하는지에는 다양한 사례가 있겠지만 핵심은 아무튼 첫 구상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다.
글쓰기는 자신의 지금 생각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파악해가는 과정이다. 문자 그대로 작가는 정말로 쓰면서 이 사실을 알아나가게 된다. 쓰고, 쓴 것을 검토하고, 누군가에게 보여준 다음 그 의견을 들으면서 그와 같은 사실은 점차 명백해진다. 그리고 거듭 거듭 생각을 바꾼다. 그러다 보면 확신이 생기는 순간이 있다. 글쓰기가 하나의 건축물을 쌓아올리는 건축 과정과 비슷하다고 여긴다면, 가장 큰 단위의 고민이 끝나는 순간 말이다. 이 건축물을 왜 짓는 것인지, 상업 시설로 쓰고 싶은 것인지, 주거 목적으로 사용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공익 목적의 건축물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는 시점이 온다. 그 다음에 해야 하는 고민은 보다 세부적인 차원의 고민이다. 상업 시설로 결정됐다면 그 공간 안에 상가를 입주시킬 것인지, 컨퍼런스나 전시회를 개최하는 컨벤션 센터를 지을지에 대한 선택이 남은 것이다.
글쓰기는 이와 같이 큰 단위의 결정을 끝내고 보다 작은 단위의 결정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마지막으로는 내외장 마감재는 무엇으로 선택할지, 완성된 공간을 어떤 소품으로 꾸밀지, 그리고 조금 더 넓게 본다면 그 공간 안에 사람들을 어떻게 데리고 오고, 그 공간 안에서 무엇을 할지도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글쓰기의 불행이 있다면 공간에 들여놓을 소품을 발견한 다음, 공간의 목적을 변경해야 할 때도 왕왕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작가라면 피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럴 땐 자신의 확신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이 부지에 쌓아올려야 할 건축물이 백화점이 아니라 스파였음이 명백해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실제로 신세계에서 부산에 백화점을 지으려고 땅을 팠는데 온천수가 터져나와 설계를 변경하여 백화점 일부 구역을 스파랜드로 바꾼 사례는 너무나 유명하다. 서울에서 빌딩을 지으려고 했는데 지하에서 유적이 발견되어 밑부분을 보존하는 사례도 왕왕 생긴다.
건축에서 이러한 일은 확률적으로 보자면 매우 이례적인 편에 속하겠지만, 글쓰기에서는 피할 수 없다는 말이 적절하다고 할 정도로 매우 가능성이 높다. 내가 썼던 처음 원고가 잘못되어 있을 확률 말이다. 이것은 글쓰기의 집을 쌓아 올리는 토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작가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글들이나 기승전결을 장르의 리듬을 철저하게 따르는 방식으로 구성하는 작품들을 제외하고 작가들은 대부분 글감에 관해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글을 쓰면서, 자료 조사를 하면서 인물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이 사실이 인과관계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알아나가게 된다. 기술의 발달에 따라 땅 밑을 측량하는 방법이 늘어나는 것과 달리 작가는 언제나 맨몸으로 작품의 대지 위에 삽을 꽂는다. 그 밑에는 실상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고, 소설가 김연수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지고야 마는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작품을 완성하는 횟수가 늘고, 이 일에 대해 능숙해질수록 자신의 첫 구상에 관한 어떤 믿음이 생긴다. 지금은 분명 불완전하지만 완전해질 수 있다는 확신. 집을 짓는 땅 밑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무엇이 발견되든, 그것에 맞추어 건물을 올리면 된다는 믿음. 이런 믿음은 다음과 같은 토대 위에서 실현 가능하다. 세계가 정교하다는 인식. 이 인식은 작가가 그동안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사고 엔진을 세계의 물리법칙에 대응하도록 이미 만들어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작가가 작품을 쓰는 건 단지 작가가 공력을 투입하는 시간의 문제가 된다. 땅 밑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든, 작가가 작품을 완성시키는 데 있어서 시간 말고 다른 문제는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작품은 주저앉는다. 김연수 소설가가 작가 생활 초기에 미완성 작품을 많이 남겼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말이다. 김연수는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설가는 불꽃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뒤에도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다. 이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다 타버렸으니까. 이제 그는 아무도 아닌 존재다. 소설을 쓸 때만 그는 소설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권 이상의 책을 펴낸 소설가에게 재능에 대해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들에게 재능은 이미 오래 전에, 한 권의 책으로 소진돼 버렸으니까. 재능은 데뷔할 때만 필요하다. 그다음에는 체력이 필요할 뿐이다.”
재능이란 포착되지 않는 어떤 것이지만 그 모양새를 유추할 수 있을 만한 단서를 위 문장에서 찾아야 한다면 단연코 “소진”이라는 말이다. 재능은 소진되는 어떤 것이라는 것. 어떤 작가가 첫 작품이 안착되는 과정을 경험하며 자신의 믿음이 현실화되는 걸 처음 목격한다고 했을 때 그건 처음이라는 의미에서 고유하다. 따라서 한 번 경험한 이후 그것을 소진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그에게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사실이 되었다.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작품을 완성하는 게 체력의 문제라고 내 식대로 하자면 시간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확신이 현실이 되는 그 긴장 상태, 두 번은 없을 고유한 첫 번째 경험을 재능이 발휘(소진)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딱 한 번이면 된다. 그 이상은 필요 없다. 재능을 발견한다는 것, 그건 결코 어렵거나 대단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유전이든, 온천수든 뭐든 터져 나올 때까지 삽질을 할 수 있는 자세. 그것이야말로 재능을 발견할 수 있는 완벽한 자세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