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본부 Apr 10. 2020

천재도 모르는 것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2018년 6월 7일. 단체 카톡방에 있던 한 친구로부터 중앙일보 뉴스 기사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2018년 4월에 퓰리처상 비평 부문을 수상한 미국 미술 비평가 제리 살츠가 프리즈 뉴욕 아트페어에서 강연했던 바를 10가지로 압축한 요약기사였다. 모든 항목이 젊은 예술가들에게 조언하는 내용인데, 그중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여덟번째 항목이었다.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가라. 버스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무조건 그곳에 가야 한다. 가서 3일을 그곳에서 보내라. 다른 곳은 필요 없다."


서두는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이라는 가정법으로 다소 너그럽게 출발하고 있지만, 나는 이 말에서 넘치고 넘쳐서 흐를 지경인 어떤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제리 살츠가 누구인지는 초면이라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프라도 미술관은 무조건 가야 하는 곳이다. 게다가 하루 관람하고 떠날 곳이 아니라 3번은 가야 뭔가를 느낄 수 있는 곳이며, 일단 갔다면 다른 곳은 가볼 필요도 없는 곳이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궁금해서 정말로 큰맘 먹고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에 갔다. 그의 말대로 세 번 갔다. 그리고 답을 찾았다. 이게 제리 살츠가 원하던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발견한 나름대로의 대답은 아래 작품에 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1656년, 캔버스에 유채 318 x 276 cm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작품의 제목은 스페인 말로 하면 <라스 메니나스> 우리 말로 하면 <시녀들>인데, 이건 화가인 벨라스케스가 아닌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서 이름이 붙었다. 왜 시녀들인가? 시녀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림 정 가운데에 서 있는 작은 소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 펠리페 4세와, 그의 둘째 부인인 마리안나의 딸 마르가리타 공주다. 그녀를 좌우에서 쳐다보는 두 여자가 그녀의 시녀들이다.


시녀들이 나와서 작품 제목이 <시녀들>이라는 다소 싱거워 보이는 작명 센스만을 봤을 때는 이 그림의 위상을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먼저 이 그림은 프라도 미술관에 걸려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곳인데, 전세계에서 몰려온 방문객들이 가득한 미술관 안에서도 가장 많은 관람객이 몰려 있는 곳이 바로 이 <시녀들>이 걸려 있는 곳이다. (직접 여러번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정말로 가장 많다.) 어찌 보면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대표하는 그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화가인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국민 화가다.)


그럼 이 그림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프라도 국립 미술관 보급사에서 발행한 <프라도 미술관의 명작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마드리드에 있는 왕궁의 널찍한 방에 두 시녀들이 양옆에서 시중드는 가운데 마르가리타 공주가 서 있다. 도기에 물을 따르려는 시녀는 마리아 아구스티나 사르미엔토이고 다른 시녀는 이사벨 데 벨라스코스이다."

(아래 그림의 부분 참고)


"그녀의 왼쪽 조금 앞으로 난쟁이 여인 마리바르볼라와 목양견이 있으며 개를 귀찮게 하는 어린 광대 니콜라시토 페르투사토도 보인다."

(아래 그림의 부분 참고)


"그 뒤로 약간 그늘진 곳에 신원 불명의 시종과 마르셀라데 우요아 수녀가 서 있고,"

(아래 그림의 부분 참고)


"그 반대편에 벨라스케스 자신이 있다."

(아래 그림의 부분 참고)


"방의 끝부분에는 역광을 받고 서 있는 시종 호세 니에토가 보이고, 걸려 있는 거울엔 왕과 왕비의 모습이 비친다. 이는 그들이 그림 바깥인 관람객들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아래 그림의 부분 참고)


주목해야 할 점은 마지막 두 문장이다.


"걸려 있는 거울엔 왕과 왕비의 모습이 비친다. 이는 그들이 그림 바깥인 관람객들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아래의 그림을 다시 보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후경을 보면 벽 한쪽에 작게 크롭된 남녀가 보인다. 언뜻 생각하면 그림 액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저건 거울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가 중앙의 꼬마 숙녀 마르가리타의 아빠 펠리페 4세이고, 여자가 왕비인 마리안나다. 가운데 선 마르가리타도, 왼쪽에서 붓을 든 채 캔버스를 앞에 두고 서 있는 화가 벨라스케스 자신도 지금 모두 왕과 왕비를 바라보는 중이다.



이건 어찌된 상황인가?


옛날에는 사진이 없었기에 초상화로 기록을 남겼다. 당연히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왕과 왕비도 화가의 눈앞에 꼼짝없이 서 있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왕을 상징하는 목양견도 있는 것이고, 궁중의 각종 업무를 맡은 사람들이 곁에 둘러서 있게 된 것이고, 마르가리타 공주 또한 구경을 온 상태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화가가 자신의 시점이 아니라, 대상(펠리페 4세 부부)의 시점을 선택했다는 거다. 따라서 이 구도는 당연하게도, 벨라스케스가 직접 본 게 아니라 상상한 것이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찬사를 보낼 수 있다고 본다. 방금 말한 시점의 전환에서부터, 다양한 인물들의 균형 잡힌 배치, 캔버스 바깥에서 시작되어 후경 뒤, 열린 문 너머를 수직관통하는 깊은 공간감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형식적인 훌륭함만이 이 작품이 주는 매력의 전부일까?


이 작품은 세계적인 거장 피카소한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 가면 피카소가 이 <시녀들>을 보고 모방한 연작이 빼곡하게 걸려 있는 구역도 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모티브로 한 연작을 약 60여 개나 남겼다.  



당시 회화는 작가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보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도구에 더 가까웠다. 표현 방식에 따라서 사조를 구분할 수는 있을지언정 작가의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는 못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만큼은 예외라고 생각한다. 조금 과격하게 말한다면 어느 훌륭한 현대 미술 작품과 견주어보아도 그 주제의 견고함, 주제 전달 방식의 절묘함이 뒤쳐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화가가 대상의 시점을 선택하고, 거울을 마주보게 하여 왕과 왕비를 반사시키는 방법으로 캔버스 바깥으로 그들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캔버스 바깥으로 대상을 밀어냈다는 점. 바로 이게 이 작품의 핵심이다.


이 작품에서 왕과 왕비는 어떤 존재인가? 작품의 대상이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작가와 독자(관객)이 작품을 매개로 소통한다고 배웠다. 이건 사실이고, 이때 작품은 작가와 독자(관객)를 연결해주는 도구적인 존재다. 작가는 소통을 염두에 두고 특정한 대상을 선택해 "모방"이라는 방법으로 독자(관객)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예외다. 작가에 의해 선택된 대상은 작가 혹은 독자(관객)와 동등한 권위를 부여받는다. 거울  반대편, 펠리페 4세와 그의 왕비가 존재하는 캔버스 바깥이 어떤 자리인가. 캔버스 위에 붓질을 하던 벨라스케스가 서 있었던 자리이기도 하며, 프라도 미술관에서 가장 많은 관객들이 머물다 가는 바로 그 자리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시녀들>을 보는 보는 사람은 직관적으로 작가와 대상과 관객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건 소통이라기보다는 합일에 가깝다. <시녀들>이 다른 무수한 초상화들과 대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거울이라는 소재를 활용해서 작품의 대상을 작품 바깥, 작가와 관객이 서는 자리로 밀어낸 것, 그래서 작품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소통 이상의 차원인 합일을 느끼도록 하는 것.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작품과 작가, 그리고 감상자의 역학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셋 중 어느 항 하나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합일을 이루는 상태는 그야말로 예술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일 것인데 이 작품은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실천하고 있다.


그렇다면 벨라스케스는 과연 이러한 주제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설계하여 표현한 것일까. 확실한 것은 벨라스케스가 자신이 만든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는 점이다. 그가 살던 때는 예술가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그런 생각이 탄생하기는 아직 한참 이른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벨라스케스의 예술가적 직관은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시녀들> 같은 작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처럼 예술가의 직관이 시대적인 생각의 층위를 한참 넘어서는 작품은 그것의 진가가 드러나기까지 수백 년이 걸리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이토록 빛을 보고야 만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시녀들>보다 크거나 화려한 그림이 지천에 널려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그 앞으로 가장 많이 몰려들지 않는가.


제리 살츠랑 대화 한 번 나눌 기회가 생긴다면 꼭 한 번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 보고 오라고 했던 게 <시녀들>이 맞느냐고. 만약 그렇다면 제리 살츠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프라도 행을 권하면서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니가 하고 있는 그 일이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런지 아닌지는 시간이 증명해줄 거라는 것. 뭐 요 정도가 아닐까나.

만약 아니면? 그럼 <시녀들>을 꼭 한 번, 아니 세번 보고 오라고 이젠 내가 권해주고 싶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실은 경의로움에 가까운 세 가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