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주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으니, 원치 않으시면 넘겨주세요!]
카라마조프가의 첫째 아들인 드미트리는 그루셴카라는 여자를 사랑한다.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하면, 약혼녀였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버릴 만큼 사랑한다. 자신의 아버지인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그루셴카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루셴카를 사랑한다.
1. 하나의 장면
여기에 하나의 장면이 있다. 드미트리는 어느 날 그루센카를 만나러 간다. 그때 그루셴카는 5년 전에 자신에게 약혼을 청했던 폴란드의 한 신사에게 돌아간 상태였고, 그것을 알게 된 드미트리가 쫓아온 것이다. 드미트리는 한 마을의 술집에서 그루셴카를 만난다. 그루셴카는 폴란드 신사, 그리고 또 다른 이들과 함께 술자리를 갖고 있었는데, 크루셴카에게는 드미트리의 출현이 너무나 뜻밖이어서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 반갑기도 했다. 5년 전 자신을 사랑했던 폴란드 신사와, 지금의 폴란드 신사는 완전히 딴판이어서 환멸감을 느끼고 있던 판에 드리트리가 나타났던 것이다.
드미트리와 폴란드 신사는 대화를 주고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서로가 서로의 연적임을 깨닫는다. 드미트리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돌아온 사이 폴란드 신사는 드미트리에게 카드 놀이를 제안한다. 유치해보일 수도 있지만 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자존심을 건 대결이다. 게임에서 드미트리는 연방 패배한다. 판돈을 올리고, 과감하게 배팅하지만 결과는 똑같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더욱 약이 바짝 올라 계속 게임에 임한다. 곁에서 지켜보던 크루센카와 다른 사람이 드미트리를 만류할 정도다. 그런데 잠시 후, 그루셴카와 지인이 드미트리를 만류했던 게, 단순히 드미트리의 이성적인 판단을 돕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드미트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폴란드 신사는 그루셴카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카드를 바꿔치기 한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장면의 처음부터 다시 읽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계속 앞으로 밀고나갈 것인가. 어느 쪽을 택하든 자유고, 득실이 다르지만, 다시 읽을 경우 시간을 좀 더 들여야 한다는 단점, 그리고 카드가 조작된 것이었음이 밝혀지기 전까지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었던 그루셴카와 지인의 감정선을 다시 한 번 정확하게 검토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 다시 읽기
이야기를 만들 때,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못지 않게 비중을 두는 것이 정보를 어떤 순서로 공개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어떤 정보는 초장부터 밝혀지기도 하며, 어떤 정보는 순차적으로, 어떤 정보는 맨 마지막에 전달되기도 한다. 어떤 정보는 완전무결한 형태로 한 번에 제시되기도 하며, 어떤 정보는 조각조각 나누어져 제공되는 바람에 독자들이 그것을 조합해서 결론을 내려야 할 때도 있다. 앞서 예를 든 장면은 중요 정보(카드가 조작되었다)가 나중에 제시되는 바람에 다시 읽을 때라야만 비로소 이해되는 사실들(그루셴카와 지인의 감정들)이 감추어져 있는 형태다. 사건의 중반부에 공개되는 정보로 인해 독자가 보다 풍부해진 시각을 갖게 됐을 때, 사건의 처음부터 검토하게 되는 경우는 비단 장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사실들은 이야기의 중반부를 넘어서, 혹은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공개되기도 한다. 이 때 절반 이상의 능선을 넘어온 독자가 되돌아가야 할 곳은 작품 전체의 1/3지점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제일 처음이 될 수도 있다. 책이 두 권짜리로 되어 있는 줄 알았다가 세 번째 권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게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이러한 사실을 접하면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다른 좋은 소설들이 그렇듯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도 그런 순간들이 곳곳에 있다. 표도르의 하인이었던 스메르쟈코프와, 표도르의 둘째 아들 이반의 대화에도 그런 순간이 있고, 법정에서 발언되는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피고인의 대사에도 그런 지점이 있다. 여기에 토스토예프스키를 읽는 하나의 기쁨이 있다.
3. 사건
사건은 어떤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전에 없던 일이 생기기만 하면 그것을 우리는 사건으로 인정한다. 작은 사건도, 큰 사건도 이 테두리 안을 벗어날 수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것을 사건으로 부르지 않는다.
사건은 뭉뚱그려서 표현한 것이고, 그 실체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것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감정, 동기, 행동, 인과.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그것을 우리는 사건이라고 부른다. 작가는 문장을 비롯해 다른 많은 것들을 다루는 사람인 동시에, 그와 못지 않게 “사건”이라는 것을 소중하게 다룬다. 이는 작가가 사건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면, 그 작가의 내공이 어느 정도 보인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사건을 구성할 때 흔하디 흔한 인과관계로 제시할 수도 있지만 보다 디테일하게, 이를 테면 “드미트리는 그루센카와 함께 도망치기 위해 3000루블이 꼭 필요했는데, 그 돈은 아버지와의 셈법에 따라 자신이 아버지한테 장래에 상속받을 유산의 액수와 일치했기 때문에 그 돈을 언젠간 꼭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 끝에, 그것을 혼자서 담보로 굳게 믿고, 자신의 약혼녀였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파렴치하게도) 3000루블을 빌렸었고, 정작 그루셴카를 만나자 너무 황홀한 나머지 그루셴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하룻밤에 1500루블에 달하는 호화 술파티를 벌였지만, 그래도 도망쳐야 하니 나머지 절반은 남겨두고 끝내 쓰지 않았었다”와 같은 식으로 구성할 수도 있다. 거기에 더해서 “아버지인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심지어 드미트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있는 바로 그 3000루블로, 드미트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루셴카를 유혹하려 한다.”고까지 한다면, 어떻게 보면 커다란 이야기의 소품 중 하나에 불과한 3000천 루불을 가지고, 이 이야기의 주요 인물 두 명의 감정과 성격, 그리고 욕망 등을 모두 다 엮을 수 있다. 신기한 것은 3000루블에 엮인 게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듯 절묘하게 만든 사건을 경험할 수 있다는 데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또 다른 기쁨이 있다.
4. 지구력
많은 글들은 야심차게 출발한다.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건이면서도 그 나름대로의 고유함을 갖춘 캐릭터, 그의 동기,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그의 행동, 거기에서 파생되는 사건들을 다룬다.
성실한 작가들에 의해 글쓰기를 할 때 체력의 중요성이 강조되곤 하는데, 이때의 체력은 말 그대로 체력이다. 운동을 할 때와 동일하게 작용하고 소진되는 바로 그 육체적인 능력.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나는 지구력도 좋은 글을 완성하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본다. 글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이야기를 만들 때 작가가 지치는 이유는, 앞서 마련한 사건이 품고 있는 밀도를 다음 사건에서도 유지하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앞선 사건이 유니크한 것이었다면 독자는 그 다음 사건도 그러길 바란다. 뒤로 갈수록 밋밋해지는 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말로는 이렇게 쉽게 내뱉었지만 이야기 전반에 걸쳐 동일한 지구력을 유지하면서 결말을 내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호흡이 긴 작품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유능한 운동선수도 뛰면 뛸수록 지치기 마련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15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중에서도 꽤 무거운 축에 속한다. 그리고 후반부에 활약(?)하는 드미트리의 약혼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독백과 내면 묘사를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제 이야기가 곧 끝나는 마당인데, 이 작가는 도대체 왜, 지치지 않는 것인가. 여기에 토스토예프스키를 읽는 마지막 기쁨이 있다.
5. 작가의 침묵
어떤 작품은 캐릭터가 작가의 생각을 고스란히 내뱉는다. 어떤 작품은 캐릭터가 작가와는 정 반대로 말한다. 이때 독자는 그 속에서 드러나는 반어법적인 작용으로 인해 작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캐릭터는 작가의 생각도, 작가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지껄인다. 이때 캐릭터들한테 입단속을 시키는 작가도 있지만, 어떤 작가들은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절묘함은 그렇게 작가가 방관해둔 캐릭터를 보면서 작가의 생각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는 데 있다. 마지막 법정에서 있는 말 없는 말 힘껏 끌어모아 웅변하는 변호인이나 검사의 발언을 들으면서 독자는 생각한다. 검사의 말이 옳은 것도 아니고, 변호인의 말이 옳은 것도 아님을. 산 사람은 누구 하나 진실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그것이 그들이 두 발 딛고 선 세계라는 인식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그리고 이 명제는 참이라고 독자가 생각하게 되는 것도 나는 작가의 계산에 포함된 일이라고 본다. 아무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이것이 이야기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