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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본부 Feb 13. 2024

작가노트를 써야 하는 이유

1) 작업의 시각적 결과물만 의존해서는 감상자들이 작업의 의도나 주제를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없다. 소수자에 대해 말하기 위해 소수자를 직접적으로 등장시키기도 하지만, 이때는 이러한 인물들이 소수자임을 알 수 있는 시각적 증거가 작품에 포함되어 있을 때라야 그것이 소수자임을 감상자들이 알 수 있다. 작품 안에 그 증거가 없다면 전시 서문이나 월텍스트에라도 언급이 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감상자들은 그것이 소수자에 대한 작품이고, 작가가 소수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비로소 알게 된다. 물론 소수자를 말하려고 소수자가 쓰던 물건을 오브제로 전시하거나 평면에 스케치하는 방식으로 전시한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때 감상자들은 서문이나 월텍스트의 도움 없이는 작품이 소수자에 대한 것임을 알기란 어렵다. 이것은 시각적 결과물을 매개로 작가와 감상자가 소통하는 미술의 본질적인 묘미이자 애로사항이다.



2) 미술은 기본적으로 그 구성에 시간성을 결부시킬 수 없기 때문에 주제를 전달함에 있어 다른 장르에 비해 까다롭다. 소설이나 영화, 음악의 구성은 감상자의 시간을 염두에 두고 가장 처음 무엇을 보여줄지, 마지막에는 무엇을 보여줄지 결정한다. 이러한 시간선 위에서 기승전결을 창출할 수 있고, 이러한 맥락을 통해 주제라는 것을 표현하지만, 미술 작품은 움직이는 조각이나 설치 그리고 미디어아트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한다면 기본적으로 처음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기승전결과 같은 시간성이 없이, 정지된 형태로 제시되는 미술 작품은 그만큼 주제를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인 시간 또한 사용할 수 없다. 이를 극복하는 작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극히 일부다. 딱 보는 순간 이해되는, 가령 나무 의자 위에 거대한 바위가 올려져 있는 종류의 작품 같은 것들 말이다.



3) 미술은 기본적으로 전시장이라는 공간에 서서 감상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정보를 담은 작품을 감상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컨템포러리 아트 중에서도 미디어 아트나 텍스트 아트 같은 경우는 시간을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하지만, 30분이 넘는 미디어 아트, 100페이지가 넘는 텍스트를 전시장에서 읽기란 쉽지 않다. (비평가나 큐레이터 같은 전문적인 감상자가 하나라도 있어 다 읽어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본다. 전문적으로 작품을 보는 사람이야말로, 서서 100페이지 짜리 텍스트를 읽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일 테니)



4) 위와 같은 이유들을 핑계삼아 작가가 작업을 설명하는 데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이것도 미술이 어렵다 느껴지는 주된 요인이 된다. “감상자들에게 해석을 오롯하게 맡겨두고 싶다”는 발언을 정말 심심치않게 듣게 되는데, 이럴 경우 감상자는 정말로 그 작품을 자기의 마음대로 해석한다. 자기 마음에 따라서, 작품을 해석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지나쳐버리는 감상자도 있음은 물론이다.


자신의 작품이 의미있고, 더 나아가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받기 위해서 작가는 감상자가 작품을 찬밥 취급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1) 2) 3)과 같은 어려운 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품이 왜 좋은지에 대해 작가노트를 통해 증명해야 한다. 나는 작가노트야말로,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미술의 한계를 정면으로 돌파해 감상자들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서문과 좋은 평론, 그리고 좋은 월텍스트는 나중 문제다. 반면, 작가노트는 작품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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