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그만둡니다.

새로운 시대 조직장의 독백

by 차준영

회사는 영리 행위를 하는 조직입니다.
저는 그 영리 행위를 돕는 일을 한 지 어언 십수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나름의 노력은 성과로 이어졌고 성과는 인정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인정으로 시작된 긍정적인 변화 앞에서 조직의 무궁한 발전을 바라며 퇴사를 꿈꿉니다.


송길영 박사님의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의 표현을 인용하며
‘상호허겁(mutual cowardice)’이 인간을 평화롭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서로를 적당히 두려워하는 관계가 생태계에 최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끼인 세대’로 분류되는 조직장입니다.
조직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고 심지어 ‘애들 편에 서지 말라’는 충고도 들었습니다.
조직장 관점에서 핵개인의 출몰은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나 자신도 핵개인의 일부입니다.
회사가 개인을 지켜주는 시대는 끝났고 개인도 더 이상 회사에 기대지 않는 시대입니다.

조직장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서로가 ‘협력’해서 서로의 성공과 성장을 함께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조직장은 평가자라는 권력으로 권위를 누려왔습니다.
평가는 회사가 조직장에게 쥐여준 무기였습니다.
조직원들은 인사고과가 떨어질까 두려워했습니다.
마케팅적으로 보자면 공포소구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습니다.
새로운 세대에게 점수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닙니다.
회사와의 관계는 거래에 가깝고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적당히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시대에 상호허겁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조직원을 두려워하는 조직장의 시대입니다.
평가라는 무기가 녹슬어버린 지금, 우리는 새로운 관계 앞에서 드디어 ‘협력’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직장과 조직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조직과 조직도 같습니다.

세상은 분리된 전문 조직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성장 시대에는 효과보다 효율이 먼저입니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끊김 없는 시퀀스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누수 없는 업무를 위해서는 ‘통’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풀스택 인재가 각광받는 시대입니다.

조직도 협업을 통해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 때 성장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성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기 위해 조직이 존재합니다.


안타깝게도 시대가 바뀌어도 ‘사일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각 조직은 자기 목표에 몰두합니다.
회사는 숫자로 말하는 곳이기에 누군가 돕는 행위는 쉽게 평가절하됩니다.

그래서 협업은 공허하게 울립니다.
누군가는 바보가 되어야만 한 발을 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저는 지금 바보가 되는 길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겉으로는 계산이 느리고 손해만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시점이 오면 분명 없어서는 안 되는 조직이 됩니다.
오히려 상위 하이어라키에 서는 조직이 됩니다.
시대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변화는 멈추지 않습니다.
개인도 조직도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과거 수십 년의 변화가 하루 만에 일어나는 시대입니다.


시퀀스적 사고: 다양한 장면(Scene)을 모아 하나의 극(Play)을 만드는 일.


개인이 될 수도 있고 조직이 될 수도 있는 장면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장면들을 모으고 편집해야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중심을 잡는 역할.
그게 저는 ‘시퀀싱 조직’이라고 부르고 싶은 곳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오늘도 마음으로 회사를 그만둡니다.
그리고 내일은 새로운 조직이라는 마음으로 출근합니다.
하루하루 변화가 쌓여 어느 순간 회사에 시퀀싱 조직이 탄생하길 바랍니다.

제가 꿈꾸는 조직은 시대에 유연하게 반응하고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조직입니다.
그리고 그 안의 조직원들도 서로를 두려워하는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의 부재를 두려워하는 관계였으면 합니다.

우리 조직은 회사의 다양한 역할을 다부지게 만져 하나의 ‘요리’를 완성하는 조직이 되길 바랍니다.
연주에서 내가 빠지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자각, 그 존재감을 가진 조직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회사가 하나 되고 조직원이 자부심을 갖는 시퀀싱 조직을 만들고 싶습니다.


저는 여전히 조직장입니다.
하지만 조직은 시스템으로 돌아갑니다.
시스템이 완성되면 조직장은 언젠가 쓸모를 다하게 됩니다.
그렇게 쓸모를 다해, 마음이 아니라 당당하게 퇴사하는 날을 상상합니다.

제가 없는 회사가 무탈하게 성장하길 바랍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려운 답에 창의적인 해답을 내놓는 조직이 되길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내일도 다시,
시퀀싱을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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