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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엄마 Sep 25. 2024

폴 비릴리오와 소멸의 미학



우리가 보는 세계는 흘러가고 있다.


폴 비릴리오의 『소멸의 미학 L'Esthétique de la Disparition 』은 ‘소멸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사유한 작은 수상록(隨想錄)이다.  프랑스의 매체 연구자인 폴 비릴리오(Paul Virilio, 1932.1.4~2018.9.10)는 기술 발전이 속도와 연관되어 이루어졌다는 관점을 갖고 과잉 속도를 지향하는 기술매체를 비판했다. 그는 속도의 사상가로 불린다.  


비릴리오는 『소멸의 미학 』을 통해 과학기술문명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 이 시대에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 즉 그 움직임/운동, 속도, 그리고 시간에 대해 성찰한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흘러가고 있다"라는 사도 바울의 경구로 시작되는 이 책은 세계를 다른 눈으로 보도록 가르치면서 기술 문명의 미래를 위해 소멸을 사유하라고 권한다. 바울의 경구를 비릴리오식으로 다시 쓰면 “우리가 보는 세계는 사라지고 있다”이다. 


시간의 사고(事故, accident), '피크노렙시'


『소멸의 미학 』은  느닷없이 손에서 툭 덜어지는 찻잔 사고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아차’ 하는 순간, 손에 쥔 찻잔을 떨어드리는 경험은 꼭 멍청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살면서 되풀이 겪는다. 그럴 때마다 “내가 정신이 나갔나 봐”아니면 “야, 너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녀? 달나라에라도 갔었냐?” 하는 요란한 소리들이 오고 간다. 


분명히 찻잔을 떨어뜨리는 순간, 우리의 두뇌 활동은 이곳에서의 정상적 의식의 흐름이 끊기고 어딘가 갔다가 돌아온 것이리라. 찻잔을 엎은 사람은 변명을 한다. “차에서 구수한 냄새가 나는데 어제 먹은 된장찌개가 떠오르고……찻잔이 찌개 그릇인 줄 알았나 봐. 나도 모르겠어. 찻잔 하나 깨진 것 갖고 뭘 그리 야단이야,”  항변하는 그 대사들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상인들이 겪는 이런 경험을 비릴리오는 인류의 오랜 질병이면서 아직 그 원인과 치유 방법을 확실히 모르는 간질 현상(이하 뇌전증)과 연관 짓는다. 뇌전증은 흔히 정상적인 의식의 흐름이 끊기고 신체 변형과 언어 장애가 극심하게 일어나는 현상으로 알고 있다. 옛날에는 신이 인간의 몸에 들어온 ‘신들림’으로 여겨질 정도로 불가사의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 증상의 폭이 넓어서 특수 레이더에나 잡히는 미세한 지진 진동같이 일상에선 지각되지 않는 미세한 경련과 발작만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경미한 발작 상태를 뇌전증 발작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뇌전증 환자가 아닌 정상인들에게도 일어나는 현상이며, 정상인 거의 모두 유년기에 빈번히 경험하다가 사춘기로 이행하면서 거의 사라지는 뇌신경 활동 현상이기 때문이다. 비릴리오는 이 현상을 ‘피크노렙시’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떨어진 찻잔의 에피소드에 적용하며 그 정상성과 일상성을 복권하고 있다. 


떨어지는 찻잔 말고도 잠을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잠든다. 누군가는 잠을 ‘다시 살아나는 죽음’이라고 했다. 우리의 일상의 흐름이 잠들면서 끝나고 깨어나면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잠자는 동안에 우리는 잠시 꿈을 꾼다. 분명 우리가 출연한 그 드라마를 우리는 깨어나선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수없이 논리가 단절된 장면들만 기억한다. 꿈꿀 때 우리의 대뇌피질과 신체의 신진대사는 활발히 돌아가고 감긴 눈 밑에서 동공은 빠르게 움직인다. 그래서 이 상태를 ‘모순 수면’, ‘렘수면’, ‘빠른 눈 움직이기 수면’이라 부른다. 비릴리오는 ‘피크노렙시’ 발작이 바로 이 모순 수면 상태와 같다고 말한다. 


‘빈번한, 자주 일어나는’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접두사 ‘피크노스(picnos)’와 ‘발작’을 의미하는 렙시스(lépsis)를 합성한 용어인 ‘피크노렙시’는 자주 일어나지만 또렷이 의식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뇌신경 발작이다. 비릴리오는 점점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기술문명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 현상들을 비평하면서 각 분야에서 유기체적 활동의 정상적 흐름이 끊기는 중단, 사고, 시스템 장애 등을 지칭하는 용어로 피크노렙시를 폭넓게 사용한다. 또한 발작으로 인한 의식과 기억의 공백 상태, 그로 인한 부재(不在, absence) 현상을 지칭하면서 이 용어를 '기억 부재증'의 의미로도 사용한다. 


부재(不在)와 현존(現存)의 진자 운동


폴 비릴리오는 피크노렙시 발작의 사례를 나열한다. 피크노렙시 발작 순간을 말로 복구하려고 애쓰는 어린아이, 몸 구르기 동작의 신체적 속도를 일으켜서 시간을 정상적인 흐름에서 데콜라주(décollage, 떼어내기) 하는 어린 소년/사진작가, 촬영기의 우연한 기술 사고로 생산된 두 개의 현실을 콜라주(collage, 붙이기) 놀이하듯 멋대로 이어 붙인 멜리에스의 영화편집 기법 등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이 발작 현상은 이미 기술문명사회 문화 생산양식의 무의식적 토대라는 점을 차근차근 밝혀준다.


영화 매체는 영사기의 강렬한 기계 빛 속에서 끊임없이 피크노렙시의 발작적 소멸을 되풀이하며 우리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시간과 속도의 매체이다. 그래서 기술문명사회의 시각과 재현 방식을 전면 재편하며 환영의 시대를 출현시킨 장치이다. 현기증 나는 회전 운동 또한 한결같이 선형적 시간과 의식의 흐름을 벗어난 피크노렙시를 야기한다.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아가는 회전목마 위의 어린 손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월트 디즈니는 그 순간 테마파크 디즈니 왕국에 대한 섬광 같은 아이디어를 얻는다. 테마파크에서 돈지갑을 여는 부모와 그들의 자녀들은 피크노렙시 왕국에 푹 빠진 우리들에 다름 아니다.  


벨기에의 멀티미디어 예술가 베르댕 (Walter Verdin)은 <비디오렙시아 Videoleptia>(1993)에서 쓰러진 커피잔을 중심 모티프로 7개의 방에 시간의 정상적 선형적 인식이 교란되거나 깨어지는 의식적 무의식적 감각의 양태들을 비디오 설치 작업으로 구현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게 의식의 흐름이 끊기는 것과 함께 시간의 선형적 흐름이 끊기는 피크노렙시 현상, 즉 이곳, 지금 이 시간을 떠나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갔다 온 피크노렙시의 부재를 가지가지 방식으로 회복하는 노력들인 것이다. 시계로 측정할 수 있는 공간화된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그 부재의 순간은 찻잔을 뒤엎는 사람만 홀로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그 발작의 순간을 재현하려는 노력과 함께 시간에 대한 명상은 나 개인의 것이 된다. 형이상학자나 전문 연구가의 것이 아니라. 피크노렙시의 순간에 개인은 나만의 시간을 사는 자유를 회복한다. 그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을 향한 우리의 열망과 만나기도 한다.  


'소멸'은 이곳에서 사라져 저곳으로 가는 움직임/운동


인간의 숙명은 죽음에 있는 게 아니라 소멸에 있다고 폴 비릴리오는 말한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 내린 신의 징벌, 낙원 추방은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소멸이었다. 남과 여가 낙원에서 소멸되어 다른 땅으로 가는 것은 인류 최초의 통과의례이자 제2의 세계 창조를 뜻했다.   폴 비릴리오에게 소멸은 ‘이곳에서 사라져 다른 곳으로 가는 움직임/운동’이다.  


그는 인류사를 점철한 전쟁의 원인도 약육강식이나 지배 종속의 생존 본능으로 보지 않고, 움직임/이동의 욕망에서 찾아낸다. 한자리에 진득이 붙어 있지 않고 들썩들썩 어디론가 가려는 욕구, 움직여 이동하려는 욕구, 다른 곳에의 동경, 미지의 세계를 향한 끝 간 데 없는 열망은 이주, 여행, 순례, 탐험으로 이어지고 자연스럽게 영토 확장의 전쟁과 함께 확산된다. 그것도 점점 더 빠르게 점점 더 머나먼 곳으로 향하면서……


그래서 ‘어디로 가게 하는’ 갖가지 운송 장치들과 전쟁 기계들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삶과 문화 전체를 지배해 간다. 점점 더 다양하게 점점 더 빠르게 점점 더 멀리 갈 수 있게 만들어지는 갖가지 운송장치들과 전쟁무기, 기술 도구들은 이제 끝도 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출현하고 있다. 소멸/사라짐의 숙명은 가속도의 시스템을 가동하는 결과를 낳는다. 초속 3억 미터의 속도로 여행하며 지구까지 닿는 데 겨우 8분이 걸리는 빛의 속도를 질투하며 빛과 속도 경쟁을 벌일 정도로 대담무쌍해진 인류의 기술문명은 인간을 ‘이곳에서 사라져 저곳에 있게 하는’ 소멸의 숙명을 분초가 멀다고 뻔질나게 반복시키고 있다. 


“우리의 삶 전부는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기차, 자동차, 비행기, 전화, 텔레비전 등 초고속 여행의 기술 도구들에 이끌려 흘러가고 있다....... 점점 더 빨라지는 속도는 우리의 시공간을 소멸시킬 것이고, 그때 우리의 현실은 무(無)와 만나게 될 것이다. 속도는 이국정서로 가득한 여행의 광대한 세계 대신 텅 빈 세계로 우리를 보낼 것이다”라고 비릴리오는 경고한다. 


비릴리오가 암시하는 광대한 무(無)의 세계는 어찌 보면 공상과학 영화에서 숱하게 만난 미래의 가상세계, 무한한 우주 공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자기가 여행하고 있는지조차 망각하는 여행자들의 온갖 움직임/운동은 사고(accident)와 점점 더 긴밀하게 동침하고 있다. 


'소멸'을 바라보는 '깨어있는 파수꾼'


비릴리오는 2003년에 자신의 저서 제목을 그대로 붙인 <무엇이 올 것인가>라는 전시회를 기획한다. 기술문명이 실제로 인류에게 가져올 대재앙의 이미지들, 사고의 이미지들을 나열한 전시회였다. 비릴리오는 속도 사회의 종착지는 소멸, 사라짐이라고 되풀이 설파한다. 


 그의 소멸은 광속도의 기술문명사회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야기하게 되는 우리 시공간의 소멸이다. 속도가 최고의 단계로 가속화되면서  현실 시공간이 소멸되어 갈 때 그때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될까? 비릴리오는 여전히 불멸-파멸-소멸이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에워싸고 있는 삼중주인데, 소멸의 추구는 얼마나 우리를 불멸과 파멸에서 구원할지, 아니면 불멸의 추구 못지않은 파국을 낳을지 ‘깨어있는 예언자’로 사유했다. 그는  “신이 우리를 몽땅 망하게 하려고 문명을 허락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고민한 ‘깨어있는 파수꾼’이었다. 문명이 결국 구원이 될 것인가 파국이 될 것인가의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의 마음과 정신에 달려 있으며, 예지가 없는 힘은 죽은 힘이라고 믿는 지성인이었다. 


폴 비릴리오의 저서들은 정치, 영화, 예술, 물리학, 군사학, 건축, 철학, 문화 일반의 다양한 분야를 한데 아울러 다루면서 독자적인 용어와 논리를 종횡무진 펼치고 있어서 그 독서의 여행길은 결코 평탄치 않다. 그러나 비릴리오 텍스트는 모든 전문 분야가 긴밀히 연결되어 엄청난 양의 정보를 공유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현대 다매체 정보사회에서 그 논리와 독창성의 중요도가 점점 크게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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