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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환상성-유령들의 삶

by 감자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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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옷을 입고 탄생한 신생아, 영화

영화는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1백 년 밖에 안 된 신생아이다. 그런데 수천 년, 수만 년 된 문학 예술 형식들을 밀쳐내고 이 1백 살 짜리 신생아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왜일까? 그건 영화가 인간과 현실을 묘사하고 삶을 조명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현실, 인간은 리얼리티로 설명하기엔 벅찬 빈 ‘구석’, 리얼리티만으로 재단할 수 없는 ‘빈터’가 있다. 영화는 바로 이 빈터에 빛을 투사해서 그 정체를 밝히려 한다. 영화의 탄생을 주도한 것은 움직임이라는 개념, 움직임에 대한 동경보다는 “화면 위라든가 상자 속에 무엇인가의 상(象)을 던지기 위해서 빛을 사용하는 개념, 즉 투사이다”라고 강조한 한스 위르겐 지베르베르크(『히틀러, 한 편의 독일 영화』의 감독)의 입장에 서면, 영화는 기계빛을 투사함으로써 실재하는 현실의 기이하고 판타스틱한 특성을 가장 정확히 부각하는 데에 성공한 예술이다.


하지만 영화만이 판타스틱을 잘 실현하는 매체일까? 영화는 다른 장르, 다른 매체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판타스틱을 실현하는 능력을 갖고 탄생했는가? 저자는 그렇다고 답한다. 그러나 ‘영화는 하늘로부터 천부적 재능을 아예 부여받고 태어난 신생아일까?라는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분명히 답한다.


영화를 이야기하는 이 책은, 이미 소설, 회화, 시, 음악 등에서 판타스틱을 최고의 경지로 구현한 사례들을 경건하게 숭배심을 표하며 소개한다. 프랑스 소설가 쥘리앵 그라크의 『아름다운 암흑』의 한 페이지는 최고 경지의 영화 시나리오이다. 예수가 부활 후 제자 앞에 나타나 대화를 나누고 사라지는 초현실적인 사건, '엠마오로 가는 길'을 묘사한 페이지이다. 또 스위스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다섯 폭 연작 작품 『죽은 자들의 섬』은 우리를 내면의 미궁 속으로 끌어들이는 판타스틱 회화이다.


아울러 프랑스 시인 빅토르 세갈랭의 시집 『돌기둥』의 여정에는 많은 판타스틱 테마군이 잠복해 있다. 세갈랭의 돌기둥들은 지구의 동과 서, 남과 북이 하나로 만나는 세계를 노래했다. 동서남북의 표지판으로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 같은 돌기둥들은 세상의 경계를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길가에 선 돌기둥들은 모든 것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숨기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영원히 무관심 속에 서 있을 수 있다. 바로 저자가 소개하는 영화의 판타스틱은 현대인들이 그토록 즐기는 영화 스크린 속에 늘 있었지만 우리가 무관심하게 대했던 것들이다.


그렇다면 판타스틱을 구현하는 데 영화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능력을 어디에서 찾아내는 것일까? 그것을 저자는 「영화와 환상성」, 「환상성의 문양들」, 「영화적 환상성」, 「꿀벌통의 정령」, 「환상성의 광채와 신비」로 나누어진 장(場)과 그 소(小) 테마들을 통해 드러낸다. 마치 판타스틱이라는 배우를 풀샷에서 익스트림 클로즈샷으로 잡아 들어가고 회전 트래블링하듯이 세밀하고 끈질기게 낱낱이 제시한다. 그래서 ‘빛을 통해 나타나는 화면 위의 비현실 세계’, ‘빠르게 돌아가는 영화 이미지 특유의 신속성 때문에, 그리고 아무리 발달된 투사 기술일지라도 제거하지 못하는 미세한 반짝거림 때문에 더 증폭’되기만 하는 스크린 위의 비현실 세계를 슬로모션으로 보여 준다.


일상은 환상성으로 이행하는 입구

영화에 나타나는 환상성의 문양들은 ‘공포’라는 심리적인 문양부터 ‘손’이나 ‘창문’에 이르는 구체적인 문양까지 셀 수 없이 많다. 우리는 이 책이 소개하는 환상성의 문양들을 감상하다 보면 결국 우리의 일상적 삶이 모두 판타스틱으로 이행하는 입구라는 것을 발견한다. 꼬마 앨리스가 커튼을 젖히자 그 앞에 당장 이상한 나라가 펼쳐지듯이 말이다. 이제 앨리스의 커튼은 영화 상영관의 문이다. 우리는 영화관의 문을 넘으면서 이상한 나라로 들어간다. 영화의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 가시화된 초현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니 이런 곳이 있었던가? 이런 미지의 곳이?”라고 우리는 반문할 것이다.


세기말에 탄생한 신생 장르, 신생아인 영화는 기존 예술 문화 장르들의 정수를 다 흡수했다. 그 정기를 뱀파이어가 피를 빨 듯이 흡입해서 영화 자신의 생명력으로 만들었다. 서구의 예술은 영화를 통해 젊어지고, 아니 부활했다. 게다가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많은 인간이라도 갈고 닦여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영화라는 신생아에는 20세기 초의 청년 세대들이 모두 들러붙어서 그 성장을 도와주었다. 영화를 탁월한 천재, 신비한 천재로 키우려고 몸과 맘을 다 바친 많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있었다. 저자는 그 사람들을 ’ 영화의 유령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영화라는 신생아가 가진 천부적 재능과 그것을 발휘함으로써 나타난 특별한 여파, 그것을 판타스틱 효과라고 칭하고 있다. 이 책의 원제목은 『유령들의 삶: 영화의 환상성』이다.


미래를 향하는 영화 속 유령들의 귀환

저자 장 루이 뢰트라는 이제까지 다소 저급한 장르로 알려졌던 환상 공포영화의 대가들을 생생하게 부활시켜 놓는다. 감독 토드 브라우닝, 마크 로브슨, 자크 투르뇌르, 잭 클레이턴, 루벤 마물리앙, 마리오 바바, 또 환상 공포 코미디의 독특한 경지를 보여준 제리 루이스, 게다가 제작자 발 루턴을 인생과 영화의 판타스틱 코드를 꿰뚫어 본 혜안을 가진 영화작가로 소개한다. 또 신비한 카리스마의 드라큘라였던 벨라 루고시, 인조인간 프랑켄슈타인의 배역으로 연기자로서 거듭났던 보리스 칼로프, 강렬한 캣우먼을 연기했던 엘리자베스 러셀을 되살려 놓는다. 특히 여배우 엘리자베스 러셀은 한 절을 할애하면서까지 그녀가 출연했던 몇 편 안 되는 영화들 속 장면들의 기이한 신비를 되살려 놓고 있다. 사실 그녀는 영화사의 수많은 스타 여배우들 사이에서 필모그래피가 빈약한 여배우이고, 어떤 영화에서는 몇 장면만 출연했다.


사라진 배우, 감독, 제작자, 이들은 유령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영화인들의, 영화 관객들의 무의식 속에 되돌아오는 유령들이고 되살아나는 유령들이다. 그들의 존재는 지금 우리의 영화 화면 속에 다시 살아나서 영화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가이드이다. 저자는 이들의 귀환을 앞으로 향하는 귀환, 미래를 향한 귀환이라는 지극히 역설적이고 시적인 표현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영화인들의 유령은 영원히 영화의 현재를 사로잡고 있고, 그 미래를 이끌어 가니까. 유령들의 영원 회귀가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 속에 눈에 보이지 않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의 삶 자체 속에 많은 유령들이 살아 숨 쉬고 있듯이 말이다. 귀 기울여 보라! 그들의 심장 고동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바야흐로 현대는 영화 담론의 시대이다. 영화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무성한 말잔치들이 벌어진다. 또 영화는 왜 탄생했는가?라는 질문에 얼마나 많은 답들이 쏟아지고 있는가?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영화는 ’ 공포심‘에서 탄생했다고 말한다. 19세기말 세상에 나타난 영화라는 신생아는 미래에 인간의 가치가 상실되고 부정되리라는 불안한 예감이 팽배한 어두운 시점에서 세상에 나왔다, 20세기에 불어닥칠 대학살들의 징조가 이곳저곳에서 그림자를 드리우는 시대였다. 그러나 영화는 공포의 소산물이자 공포를 대면하고 이겨내려는 세기말 인류의 염원이 만들어 낸 기적이다.


어두운 영화관 속에서 스크린에 투사되는 기계빛의 세계는 다시금 인간이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희망과 삶의 애정을 되살려 주었다. 그러니까 서구 문명사회의 죽음과 재탄생 사이에서 태어난 영화는 서구 사회의 새로운 희망, 20세기 인간의 새로운 희망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유령, 자아 속 잠재된 타자들

이렇게 태어난 영화는 당장 1890년대의 판타스틱 문학 작품들에서 많은 주제들을 빌려온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투명인간』, 『드라큘라』, 『나사못의 회전』 등의 소설 작품에는 그 주체들 속에 이미 영화적 장치가 내장되었다. 또 SF 소설의 개척자인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의 『카르파티아 산맥의 성』은 그 장소 자체가 바로 브램 스토커 소설 속에서 드라큘라 백작이 거주할 성으로 임대된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성에서 고르츠 남작은 죽은 여가수 스틸라의 녹음된 육성을 들으며 거울과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스틸라의 모습, 그 시뮐라크르(환영)를 보고 듣는 상상 체험을 매일 밤 즐긴다. 쥘 베른의 조야한 기계 장치는 이미 경탄할 만한 영화 장치의 예시였다.


영화 초창기에 죽음을 넘어선 삶의 보존이라는 예술의 테마는 영화의 주요 테마로 확실하게 자리 잡는다. 판타스틱 영화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공포영화들의 세계, 죽음과 불안과 미로의 세계는 이런 죽음과 재탄생 ‘사이‘를 드러내고 있다. 영화 장르의 경계를 구분할 필요 없이 영화에 존재하는 판타스틱, 영화의 환상성은 바로 출현과 소멸 ‘사이‘에서 탄생한다. 나타남과 사라짐, 탄생과 죽음, 즉 사이 공간, 사이 시간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판타스틱 영화에는 필연적으로 유령들이 등장한다. 그 유령들은 뿔 달린 악마, 날개 달린 천사들이 아니다. 지옥의 악마, 천상의 천사를 캐스팅할 필요는 없다. 판타스틱 영화에 필요한 유령들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다.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 ‘라는 리어 왕의 절규까지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라는 속담을 자주 되씹는다. 내 앞의 친구, 동료, 그들의 실체를 그대는 아는가? "내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느냐?"의 질문은 나의 자아 속에서 잠재적 타자와 맞닥뜨렸을 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기 소외와 낯섦의 인식은 타자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아 속에서 생긴다고 들 한다. 저자는 이런 나의 자아 속의 잠재적 타자를 유령이라고 부른다. 내가 잘 모르는 내 안의 나, '한길 사람 속' 에 숨어 있는 비밀을 푸는 코드는 유령인 것이다. 판타스틱 영화 속에서, 아니 우리 삶 자체 속에서도 인간과 유령은 경계로 나누어진 존재가 어니다.


영화의 환상성으로 인도하는 유령들의 영원회귀

『인간 희극』의 작가 발자크는 "인간의 육체는 층층이 중첩된 무수한 환영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시각은 켜켜이 쌓여 연결된 이런 환영들을 육체로 지각하는 것이다.... 매번 사진이 찍힐 때마다 육체라는 것은 자신의 환영들 중의 하나를 하나씩 하나씩 상실한다. 즉 자기 본질의 일부를 상실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발터 벤야민은 사진 속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공존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특별한 차원의 시간성'이 있다고 했다. 사진술은 발생 초기에는 찍히는 자의 육신의 외관들을 양파 벗기듯 벗기면서 심령체를 노출시킨다는 풍문까지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영화는 사진술을 뛰어넘어 죽은 자들을 다시 불러오는 유령 기계라고도 했다. "너 자신을 알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영화라는 신생아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유령은 네 실체의 비밀을 풀어내는 암호, 키워드이다. 네 속에 있는 유령을 정직하게 인정하라.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보일 것이다! 너의 인생은 달라질 것이다!”


영화는 초자연, 초현실, 비현실, 상상계 등을 우리 눈에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점점 더 고도의 과학 기술 장치를 개발하며 성장해 왔다. 그러나 애초에 영화는 죽음에서 돌아온 유령의 옷을 입고 태어났다. 그동안 파묻혀 있던 인간의 빈터, 삶의 빈터, 태양빛 아래 억눌려서 소리 내지 못하고 보이지 않았던 그 빈터가 기계빛을 받아서 유령의 판타스틱한 옷을 덧입고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어둠 속 기계빛의 환상성 속에서 새로운 생명력의 약동을 들려준다. 그 판타스틱 월드 속에서 영화의 관객들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자기 유령을 재발견하면서 낙심에서 깨어나고 절망에서 일어났다. 앞으로도 계속 영화 속 유령들의 영원 회귀는 우리를 앞으로 앞으로, 새로운 내일을 향해 이끌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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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환상성, 장 루이 뢰트라 저/ 오일환,김경온 역/ 동문선,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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