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콩나물의 집

by 감자나무

이걸 묵으면 나쁜 기운들이 네게 달려오기 전에 할아버지가 너를 지켜 줄 거야. 늦은 밤 입안에 가장 먼저 넣어주었던 맨 물에 만 밥. 너는 아직 술을 마실 수 없지. 보리차도 아니고 수돗물에 밥을 말아먹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큰 집이 아닌 우리 집에서 제사를 처음 지냈을 때에도 수돗물 밥은 왠지 싫었다. 수도관이 문제인 건지 물이 가끔 노랗게 보였단 말이야. 내가 작은 생수병을 하나 사 올까? 굳이 왜 맨 물에 밥을 말지? 우리 아빠는 맨 물보다 만두를 삶은 물에 만두를 부셔먹는 것을, 찬 밥에 따뜻하게 끓인 물을 붓고 김치를 올려 먹는 것을 더 좋아했는데. 제사는 생일만큼 주인의 취향을 잘 지켜주지는 않나 봐. 그냥 좀 먹어라, 한 번 먹는다고 안 죽어. 복을 건네고 나쁜 기운들을 지워줄 수 있는 마법이 분명 존재한다면 효험 있는 물밥입니다- 말하며 돈 주고 팔겠다. 밑져야 본전이지. 옆집도 명절에 객귀밥을 내려놓잖아. 내가 아빠였으면 차라리 계란밥을 주었을 것 같아. 콩나물김치죽도 좋지. 어우 미친년-

기숙사를 잡고 본가에서 가장 먼저 밥솥을 챙겨 왔던 동료가 있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의 밥솥이 생각나는 이유는 그가 쌀을 사본적은 없었다는 것. 햇반을 넣어두면 언젠가 밥이 되거든. 사용감은 있었으나 크기가 컸던 붉은 전기밥솥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던 아빠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알 수 없지만, 그 밥솥마저 수명을 다 했던 날 엄마의 눈물에 눌려진 목소리를 동생은 듣고만 있지 않았다고 했다. 공식몰에서 버젓이 팔고 있었어. 압력밥솥도 아닌 것을 요새 누가 사겠냐며 대리점이라도 찾아가 볼까 생각했는데. 인터넷으로 인한이가 그냥 사 줬어. 그래, 휴대폰 번호도 버리기 싫었지. 주인이 바뀌었지만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휴대폰을 잃어버리고는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았다. 김치를 챙겨가지 않았다. 양푼 냄비에 간장을 끓여 부었던 장아찌를 끝까지 먹지 않았다. 쌀 대신 밥 박스 가격을 살펴보았다. 집으로 다시 돌아올 때 다른 건 몰라도 전자레인지를 챙겨 오도록 해. 취사 버튼을 꼭 눌러줘야 해. 큰일 나.

함께 편안하고 맛있는 시간을 보낼 때마다 작은 것들을 하나씩 챙겨주곤 했지. 버스를 타고 농수산물 시장에 직접 찾아간다고 했어. 검은 봉다리에 귤을 딸기를 담으며 내게 건네주는 순간을 상상했겠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는 것이 맞아. 이야기를 듣다 보면 놀랍기는 해도 불편하지는 않거든. 뒤뚱뒤뚱 느리게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시장에서 무엇을 얼마나 살지를 생각하고 장을 보는 사람이 많을까? 그 언니는 아니야. 얼마 전에 먹은 감자탕에 들어갔던 우거지도 5,000원에 팔고 있었다는데 그날 손질한 배추들을 다 모아둔 것 같았대. 하나는 머리에 이고 하나는 질질 끌고 갔다는 말에 네 손을 잡고 인한이는 엎고서 보건소에 갔던 날이 기억나. 그땐 산 가까이에 있어서 경사가 있었거든. 머리에 이고 있던 것 하나를 그냥 내게 준 거지. 나는 그걸 삶아서 맛있게 먹었고. 그래서 오늘은 콩나물이랑 숙주를 1킬로씩은 챙겨준 것 있지. 상자째로 샀대. 같이 식자재마트에 갔던 적이 있거든. 멀다고 잘 안 갈 줄 알았는데 종종 놀러 가는 것 같더라고. 내가 1시간만 늦게 보자고 해서 갔다 왔나. 그 언니 마늘 다질 때 내가 놀러 갔는데-

엄마의 배처럼 부풀어 올랐던 김치에서는 이모와 할머니의 김치가 절묘하게 섞인 맛이 났다. 양념이 넘칠 뻔했지만 야채의 표면에 하나도 빼먹지 않고 과하게 스며든 맛. 배추가 비쌌잖아. 다발 무도 넣었고 네 할아버지가 배추 머리를 무처럼 아삭아삭 씹어 먹는 것을 참 좋아했는데. 그래, 주인을 기다리며 시들고 있었던 봄동도 넣었고 다른 곳에서는 우거지로 빼두었을 억센 잎도 넣었지. 그래도 뻣뻣하지 않지? 괜찮지. 육수를 넘치게 부어서 축축해진 것 같아. 농도도 어느 정도 괜찮았나 봐. 목격한 사건을 생각하면 결과가 놀라울 정도로 맛있는 김치였다. 또다시 언젠가 고향으로 넘어가 작은 식당을 하나 해야 하는 맛이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저 미친년의 상상을 누가 말리겠냐며 유통기한이 어제까지였던 두부를 꺼내고 밥솥을 열어보니 콩나물이 왜 우리에게 덥석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지. 취사를 누르지 않았어. 보온으로만 계속 있었으니 쌀이 밥이 되지 못하고 서걱서걱 거리는 죽이 되어 버렸지 뭐야. 작은 구멍가게에서 큰 밥을 샀다. 하나에 2,500원이었다. 이상한 마트에서 상자째로 할인하던 밥상자를 하나 집어오고 싶었던 이유도 여기 있었네.

넓고 두껍게 썬 무와 김치를 넣고 동태찌개를 끓일 시간이 오지는 않았다. 인한이가 여자친구를 데리고 오면 엄마는 무엇을 만들어줄 것이냐 물었을 때 저녁 메뉴를 고민하던 아빠가 동태찌개 끓여야지 중얼거리던 순간이 우리에게 웃음으로 깊게 판 무덤 안에 묻혀 있으니 나는 김치를 넣지 않은 동태찌개를 먹지 않았다. 꽃게탕을 먹지 않았다. 생선이 싫어졌다. 생선 냄새가 밴 집, 낯익은 것이 낯선으로 바뀌었다는 것에서 오는 상실을 가까운 곳에 두고 싶지 않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투덜거렸다. 문을 열고 향초를 켰다. 그런데 콩나물 김치죽은 먹고 싶어. 가끔씩 계란이 있으면 횡재라고 함께 넣고 끓였던 것을. 우리 집엔 이제 김과 김자반도 있으니까. 또 다른 김치가 과거를 어떻게 연결할지 궁금하니까. 아빠의 안부를 전해 달라는 엄마의 전화에 나는 쇼부를 보러 간 것이지 안부를 전할 생각은 없다 날카롭게 말하며 엄마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을 때 가볍게 움직여보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요새 엄마가 전보다 일하기 싫은가 봐. 좀 더 재미있는 것을 찾아 줘. 집으로 돌아와 순대를 사고 신호를 기다리다가 그와 비슷한 슬픔을 지닌 중년의 남성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아빠의 웃음은 러시아의 외투를 잃은 남자를 닮지 않았을까 인정하고 만 나를 알아차렸다. 거기는 좋지. 그치

매거진의 이전글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