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박을 찾은 강아지의 눈이
내일도 어김없이 뜨는 붉은 태양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은 오늘 해야 할 것들이 정리되지 않아도 잠에 드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어. 알람을 23분만 더 일찍 맞추면 출근 전에 그것을 끝내고 갈 수도 있을 거야. 주말에 해도 상관은 없지. 눈꺼풀이 아래로 무겁게 내려가고 있어. 다시 들어 올리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무거움이 눈을 타고 머리로 올라가. 이제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아니 못할 것 같아. 지금 해야만 할 것들을 생각해 내는 것보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데우는 햇빛을 느끼며 익숙한 시간의, 낯이 익은 사람들이 몇 앉아 있는 버스를 탈 수 있는 몸으로 돌아가는 게 더 중요해. 그것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지. 나는 이제 잘 거야. 저번 주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오늘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너는 안 잘 거면 네 방 가서 혼자 재미있게 놀아.
쿨쿨 잠을 자고 있는 너의 볼에서는 집에서 만들었을법한 생크림 냄새가 났다. 집에서 생크림을 만들어 본 적이 있냐고? 아니, 내가 좋아하는 버터 냄새보다는 좀 더 산뜻한 냄새가 났거든. 우유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우리 엄마는 강아지가 아닌데. 모두가 조용해지는 시간,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도 저절로 소리를 줄여야 할 것 같은 시간에 나는 생크림을 품고 있는 당신에게로 찾아가 이상한 이야기를 던지기 시작한다. 내게도 잠이 찾아오고 있음을 인정한 거야. 오래된 기억 속에, 내가 아는 모두가 잠 속에서 느긋한 춤을 추고 있지.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눈에 눈물을 머금고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을 의자에 앉아 구경하고 있는 엄마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 진영아, 옛날에 강생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할머니 말이 법이라며 넙죽 엎드려 말을 잘 듣는 형이었고, 또 다른 놈은 누굴 닮아서 늘 사고만 치는 누런 놈팡이 동생이 있었대.
아무도 집에 없을 때, 밤이 아닌 밤에 잠을 많이 잤어. 이상한 책을 읽었어. 책이라기보다 작가가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단 말이야. 안 그래도 된다는 말을 뚝 잘라서 한 입에 삼켜 버릴 수가 없어. 나는 라임 레몬맛 막대사탕이 제일 좋은데, 그래서 제목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지만 이제 읽지 않는 책들만을 모아둔 책장의 틈에 놓아두었어. 이제 그 사탕이 언제부터 내 방에 놓여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안 그래도 되는데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 흔들리는 생각들 안에 집어넣고 싶었어. 맑은 정신만 있다면 피곤한 몸을 다시 일으킬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바보 같은 믿음이 아직까지 남아 있나 보지. 신기한 건 그럴 때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경유지에서 나를 집어 너의 이야기도 들려달라는 책들을 만나게 되더군. 이번에도 유독 추운 밤이었는데, 지도를 보고서도 길을 헤매며 찾았던 중고서점에서 순전히 책이 예쁘게 생겼다는 변태 같은 직감으로 들고 왔었어. 이게 또 서점 옆 이름이 낯이 익은 커다란 문구점에서 집어온 오스트리아산 연필의 색깔이랑 너무 잘 어울리는 거야. 요즘 나온 책들과는 다르게 거칠게 재단된 옛날 책들은 손톱으로 벅벅 긁고 싶어. 겨울만 되면 허벅지와 팔뚝이 간지러워 벅벅 긁는 것 대신. 그게 미웠었나. 나를 계속 끌고 가더라고. 너 이런 이야기 좋아하지 않냐고. 내가 누군지 아냐고.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오래된 책이라서 좋았다고? 그래서 무슨 꿈을 꾸었는데?
하루는 그 말 더럽게도 안 듣는 강생이가 마룻바닥 아래, 그러니까 계단의 틈에서 흙을 열심히 파고 있는 거야. 이놈 자식 이러다가 집이 무너질 거야. 해도 말을 들어 먹지를 않아. 그래서 그 강생이를 말리려다가 저런 놈이 말린다고 말려질 놈이었으면 지 형처럼 따뜻한 데서 철퍼덕 엎드려 잠이나 잤겠지 싶어서 할머니도 그냥 잠을 잤대. 눈을 떠보니 글쎄 그 강생이가 커다란 단호박을 할머니 옆에 두고서 꼬리를 치고 있었다는 거야. 땅속에서 단호박이 자라? 내가 봤던 호박은 감자나 고구마처럼 시꺼멓지가 않았는데. 그래그래. 엄마 내 말이 들려? 집에서 만든 생크림 같은 볼을 가진 사람이 잠이 들 무렵 다시금 단호박과 강생이를 조용히 내뱉어보아도 그다음을 들어보진 못했다. 눈을 뜨고 내 꿈이 무엇인지를 묻는 쌩쌩한 눈을 가진 사람에게도 단호박은 열매고 감자와 고구마는 뿌리라는 소리만 들었을 뿐. 옛날에 같이 살았던 강생이들이 서로 좋다고 들러붙어 있었던 것을 열을 삭이며 지켜본 적이 있었지. 그땐 너희 아빠를 만날 때가 아니라서 저것들은 눈치도 없냐며 앞담을 깠어.
미리보기로 한 번 살펴보고 상호대차로 받아 온 책이라 같은 부분을 한 번 다시 읽었는데 별 의미도 없었거든. 부모님이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외부 세계, 그러니까 지금 머무르고 있는 곳과는 다른 이국의 풍경을 책에서 만나보았던 모양인데, 작은 단어들을 풍풍 던지더라고. '오두막집', '초원', '거위치기 소녀' 같은 단어들은 어린 시절 내내 나를 흥분시키고 유혹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다시 돌아가시는 꿈을 꾸었어. 명절이라고 큰 집에 찾아가서 식사를 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이번 꿈은 그 이후였던 것 같아. 아니, 이번에는 예쁜 옷을 입고 있었고, 우리는 멀지 않은 장소에서 또 다른 일이 있었어. 택시를 잡아타려다가 가방을 챙기지 못해 다시 집으로 들어간 내가 어떤 사건이 생겼다는 것을 커다란 소리로 알아차린 거지. 엄마의 눈물은 보았지만, 장소나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진 않았던 것 같아. 선명한 꿈이라서 어떤 의미가 있나 검색을 해 보았거든.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거기 있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해. 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외가의 사촌 동생과 회사에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꿈에서 나올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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