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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의 아이스크림

by 감자나무

통창에 붙어 있는 종이를 확인하고 들어가야 해. 종이를 확인하면서 사장님이 재고를 채우고 계시지는 않나. 가게가 붐비지 않는지를 같이 확인하는 것도 좋지. 몰고 다니시는 빨간색 오픈형 트렁크에 상자가 아직 많이 남았군. 진라면이 2,900원, 라임 콜라가 1,200원 감자칩 3개 묶음이 3,000원ㅡ중간에 맛없는 것을 넣어둔 것 아냐?ㅡ올해의 마지막 특가로 빵빠레(초코, 크림 맛) 1,000원. 한여름에는 팥빙수를 1,000원에 팔았는데, 겨울에는 빵빠레가 더 잘 어울리나? 할인을 하지 않아도 잘 팔렸다면 여름에 더 어울릴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깐 터덜터덜 동네를 산책하기 좋은 계절의 일요일 아침. 그날따라 먹고 싶거나 다른 것보다 많이 남아 있는 우유맛 빵빠레를 집어 결제를 하고, 플라스틱 포장재를 분리해 가까운 분리수거함에 넣고, 최대한 천천히 걷기로 한다. 단추가 달린 옷을 입고 싶어. 한 두어 개 단추를 풀고. 고구마 맛도 생긴 것 같던데 꼭 맛있게 먹은 것들은 다시 보이지를 않네.

양평에 가면 나는 입을 벌리고 동네의 지하 마트, 서늘한 과자 코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멍 때리는 꾀죄죄한 여자애 대신 햇빛이 드는 방의 부엌의 거실의 평상의 모서리에 앉아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다 히죽거리며 모두가 자리를 비운 식탁과 조리대와 가까운 곳의 바닥에까지 쌓여있는 음식, 아직 음식이 되지 않은 재료들을 힐끗거리며 손을 놀리는 미래가 걱정되지만 어디서부터 뜯어고칠지, 그전에 내가 손을 대어도 되는지, 내 자식이 저런 모습이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며 지금 하고 있는 일로 돌아가게 만드는 그래, 차라리 투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이 모습을 지우고 싶은 네가 던지는 말을, 막아버리는 입을, 푹 내쉬는 한숨을 듣고 싶지 않았어. 아무 냄새도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사람이고 싶었어.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이상한 여자아이로 배려받을 필요 없이 저 밖으로 강아지나 물어가라고 친구 하라고 집어던져지고 싶었어.

엄마는 굳이 기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등산 가방에 캐러멜 시럽과 계핏가루를 아낌없이 뿌린 두꺼운 식빵을 챙겨갔다. 밖에서 사는 것도 맛있겠지만 네가 회사에서 들고 온 것을 우리 엄마랑도 같이 먹고 싶다고. 밖에서 사면 돈이 들잖아. 익산역에서 택시를 타면 10분이면 되는 걸 버스를 타겠다고, 외삼촌을 기다리겠다고 3시간을 역 근처 커다란 빵집의 버스정류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지. 늦은 밤 외할머니와 함께 딱딱하게 식은 간식을 먹을 때 어떤 말 대신 음식이 목 아래로 넘어가는 꿀떡꿀떡 소리가 좋았어. 떡국의 고명을 주워 먹고 제사상에 올릴 곶감을 주워 먹다가 한 소리를 듣는 큰집의 넘쳐나는 맛있는 음식들도 좋았지만 이상한 냄새나는 냉장고와 양말이 쥐덫에 붙지 않을까 살금살금 걷는 화장실과 함께 잠을 자고 일어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턱을 괴지 말라고 큰 소리로 호통을 치시는 외할머니를 무서워했지. 후회하게 될 거야. 같이 비싼 죽집에 가고 싶었는데, 시장에 가서 눈으로 땅이 아닌 간판을 보고, 사람이 많은 떡집에서 떡을 사고 전화를 받아 이제 곧 간다고, 맛있는 떡을 샀다고 말하는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지붕이 비를 막아주는 벽이 없는 큰 식탁에 앉아 할아버지 옆에서 오른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젓가락질로 비싼 고기를 집는 척을 하며 열심히 받아먹다 보면 어느새 술로 얼굴이 붉은 아빠들이 먼 곳의 구멍가게가 문을 닫기 전에 술이 충분하지 않았다며 술을 사러 갔었지. 우리 딸내미 좋아하는 칸쵸도 사 줘야지. 우리 딸은 감자칩을 좋아해. 나는 아이스크림이나 사야겠다. 입을 다물고 있는 아빠는 그들의 이야기에 발걸음에 끼어들기 싫어 화장실로 담배를 붙일 수 있는 곳으로 도망갔겠지.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 무서운 게 맞나 봐.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그러질 않는데. 낯선 사람들에게는 말을 걸기 어려워. 너희들은 같이 살았는데도 이제 좀 낯설지. 우린 어린아이가 아니잖아. 형 조용히 하고 아이스크림이나 먹어. 자, 진영이도 하나 먹고. 어머, 우리 딸이 좋아하는 건 이제 없네. 진영이가 먹어. 우리 딸에게는 내일 바로 사 줄게. 내일모레도 사 줄게. 아냐, 언니 먹어! 아이스크림을 건네기 대신 뚜껑을 열고 한 입 크게 입안에 넣기. 언니의 눈을 보기. 눈을 보지 말걸. 표정을 고민하지 말 걸.

집에서 터벅터벅 내려가다가 아빠가 일하는 빌라 단지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하고 있는 아빠를 슬쩍 바라보고는 내가 없었던 척 빠르게 뛰면 오후에 왜 그렇게 뛰어갔냐고 서운하게 묻는 아빠를 다시 보고 싶나. 이제 아빠에게 빵빠레를 두세 개 건네고 냉동실에 넣어두는 아빠를 보고 함께 입안에 앙 넣을 수 있을 만큼 내가 컸나. 나에게 허락된 것이 아닌가. 돈이 생기고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화려한 복수를 하지 않았어. 언니의 내일이 부러웠다고 2-3시간을 기다렸었던 정류장의 빵집이 유독 컸더라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나의 지우고 싶은 기억이 살아있었던 적은 없어.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나를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아. 아이를 키워야 해. 빵집은 사라졌어.

자리를 피할 수 없었던 어떤 추석에 아이스크림을 큰 통으로 사간 적이 있었어. 네가 아이스크림을 내게 안겨주는 모습을 보는데, 너는 내 딸이 아닌데도 뭉클했어.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 보여주기 싫었던 모습들은 크게 잡아 잘라내어 버렸구나. 네가 몰랐던 것이 아니구나. 네가 올까 봐 명절마다 잡채와 사라다와 홍어탕을 많이 준비했었는데. 너희 엄마 편으로 보내주었는데, 홍어탕은 냄새난다고 들고 가기 어려워했지. 추운 겨울이 오면, 서러운 감기에 걸리면 그 대책 없는 맛이 가끔 떠올라요. 그렇다고 홍어 가게에 찾아가 본 적은 없었지만요. 길었던 감기를 지워내고 다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아빠의 빌라 단지를 천천히 걷는데, 뿌옇던 하늘이 햇빛을 받아 따뜻하게 나를 감싸주는 것을 느꼈어. 자주 와. 멀어지려 노력하지 말고, 목소리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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