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넌 어디에 있니

by 감자나무

돌림노래네요. 계속 똑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잖아요.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이상했어요. 낯설게 느껴져 바로 창을 닫았어야 정상인데 가만히 두었던 제가 멈추지 않았던 제가 그때도 어디까지 움직이게 될지 궁금했던 것 같아요. 크기도 큰데 500쪽의 두껍고 작은 글씨로 본문을 채운 오래된 책인데요. 4일 치의 사건을 담고 있어요. 내용도 단순해요. 네, 작가는 오래전에 멀어져 지금 본인의 삶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도 않는 가족과 빠져나왔던 국가를 다시 들쳐 올려 이미 죽어버린 것들에게 반응 없는 책임을 물어요. 투덜거리면서도 융통성 하나 없이 지겨운 삶을 유지한 가족들이나 티끌 하나 부끄러운 것 없다고 우리는 위대하다 말하는 조국인지 개뿔인지나 그런데 책임을 묻고 있는 나도 과거의 나에게서 흘러온 것이니 내 뿌리의 장소를 어떻게 옮기겠어요. 로마에서 독문학 선생님으로 사는데 뭐, 비싼 집을 빌릴 수 있는 것도 잘 만난 부모님 덕인 걸요. 서보 머그더는 화자가 본인이더라도 조금은 먼 곳에서 보거든요.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에서의 변화를 발견하는 것이 보물찾기 같아 참 재미있었는데, 베른하르트는 우선 너무 가까워요. 지독하죠. 그래요. 정신병자 같아요. 숨김없이 미워해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 희미한 소리들에 빠져나오질 못하고 이미 갈라진 피부에 칼질을 반복하죠. 빠져나왔다 믿었지만 여전히 그곳에 틀어박혀 있는 조각들이 다시 모여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거예요. 나는 바란 적이 없다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데 이 과정이 조용할 리 없죠. 살려낼 수 없을 거라 말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도 전파사 사장님의 눈은 다르잖아요. 또다시 약간의 변화라도 보인다면, 내가 부러뜨린 것에서 또 다른 것이 터져 나왔다면 그것을 물고 다시 늘어져요. 물고 늘어질 수 있는 곳이 내 자리인가. 그래서 아무리 부서뜨려도 다시 또 만나나. 아, 잠을 잘 수가 없어.


다 왔다. 다 왔어. 여기만 넘어가면 되잖아. 부평역에서 인천행 표지판을 보고 앞으로 움직였던 엄마의 무거운 발걸음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 엄마 아빠는 나만 보면 맨날 뭘 챙겨주려고만 해. 엄마, 다시 그것을 타면 우리 아까 탔던 것과 같은 열차를 타고 더 내려가는 거야.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야. 설마 내가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죽을까- 힘이 들면 퉁명스럽고 두터워지는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요. 집으로 가면 또 뭘 먹이고 재우지? 집 가는 길에 라면이라도 사갈까? 진영이는 라면 많이 먹으면 또 벅벅 긁을 텐데. 저 사람의 감정을 파악할 수 있는 내 귀가 싫어요. 나도 딸이고 싶어. 나도 우리 엄마가 보고 싶어. 할머니는 나나 동생 말고 그냥 엄마가 보고 싶을 텐데. 나는 내 자리가 없는 기차 안에서 나도 너보다 어릴 때 우리 엄마를 보며 말했었는데 그 자리는 우리의 자리가 아닌데 왜 뻔뻔하게 앉아야 하냐고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고. 가방에 싸둔 얼음물이 녹아요. 가방을 메고 의자에 앉아 있었죠. 딸이 손녀와 함께 와도 엄마에게 큰 소리를 치는 아빠가 미웠어. 오줌을 싼 것이 아니에요. 진영아, 네가 가 봐. 네 할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듣고 와.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쩌겠어. 할머니를 불러오래. 나도 출근하러 가야 하는데. 어차피 계속 볼 사람이 아니잖아. 엄마 나 가기 싫어. 나는 재미가 없어. 3-4시간 자리 없이 서서 눈치를 보는 것도 싫어 눈치 볼 것도 많다.


자리. 내 자리. 내 것.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갑자기 받은 한계 없는 자유가 너무 무거웠어요. 숨을 쉴 수 있는 자리,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라도 내가 보지 않은 사람이 하나 더 있나 살펴보는 긴박한 움직임을 듣지 않아도 되는 자리, 나의 선택을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않겠다는 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속에서 당신이 보이는 거야. 내 머리 위에 올라서서 좋은 말 할 때 입 다물고 잠이나 자라고 중얼거리는 그 주둥이가. 나는 이것이 너무 미워서 괜히 삐죽거리며 싸움을 걸고 싶어 하는 입을 막는 손. 제발 사라져. 제발 죽어버리란 말이야. 아무 소리도 하지 말란 말이야. 어떤 표정도 짓지 말란 말이야. 이미 이곳엔 아무것도 없어. 너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그 존재를 혼자 보고는 중얼거리지. 한 사람을 위해 내지르는 말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과 하얀 종이를 채우는 미운 말들. 까불지 마.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어디서 어른한테 그런 소리를 해. 가르치긴 뭘 가르쳐. 당신은 세워지기 시작한 관계들을 지워버릴 줄만 알잖아. 나는 그런 인간을 어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말을 지워. 목소리를 내지 마. 늙었다고 모두 어른이라면 한숨에도 눈치를 보아야 해. 정상이기를 포기해. 답답해. 사람으로 봐. 네 옆에 있는 사람이 어떤 모양으로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든 너와 같은 풍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같아. 그 풍경 속에서 어떤 것을 보고 있는지 궁금할 수도, 궁금하지 않을 수도,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너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 나만 아프면 되는걸. 아니, 그건 내게 아픈 장면이 아니아. 네게만 아픈 건지도 몰라. 그러니까 아프다고 엉엉 울어도 되잖아.


온종일 흔들린다고 무엇에 고통스러웠는지를 찾다가 마주친 곳에서는 고장 난 텔레비전이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목격했지. 커다란 발로 그것을 꾹 누르려다가 그 소리에 내가 반응하고는 시끄럽게 떠든다. 너는 뭐가 잘나서 아직까지도 살아있냐고 무엇을 먹고 그렇게 꺼지지 못했냐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면 모두가 관심을 꺼버렸으면 너도 자연스레 사라져도 되잖아. 왜 이렇게 끈질기게 남아 다시 찾아오게 만드는지를 묻다가 네가 여전히 살아서, 아무 망설임도 없이 나를 부셔줄 날만을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보이지 않는 거야. 아픈 것을 모르는 거야. 모두가 자기의 아픔에 덮여 있잖아. 나의 아픔이 너에게도 다가올까, 나의 기쁨이 너에게도 다가오겠지 같이 놀아주는 건 네게 고마운 일이겠지. 표정보다 내가 먼저가 된 거야. 말을 하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으면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 거야. 숨겨야 할 것들과 숨기지 말아야 할 것들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집어 오고 싶은지를 결정하고 싶지 않았다. 부시기 전에 웃고 와. 별것 아니라는 이야기를 심각한 표정들 속에서 듣고 와. 이제 어렵지 않다는 것을 너도 나도 잘 알고 있지.

매거진의 이전글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