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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진 주둥이로

by 감자나무

근면, 성실, 노력. 옛날엔 뭔 뜻인지도 모르는 급훈이 칠판 위에 붙어 있었는데. 두 글자 내뱉기는 쉽지. 부지런히 일하며 힘써라, 정성스럽고 참되어라,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하여 애써라. 그런데 무엇을 위해 꾸준히 똑같은 마음으로 몸을 가꾸라는 거지? 내가 살던 시절에는 그 무엇이 나름 분명했어. 돈이 따박따박 나오는 직장에 들어가 성실하게 일을 하고, 비슷한 사람을 만나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고, 남 보기 부끄럽지 않은 가정을 꾸려 늙으면 우리가 꾸린 커진 가족들의 따뜻한 웃음 속에서 얌전하게 죽는 것. 더러운 과정들을 보면서도 못 본 척하는 것이 지금보다는 어렵지 않았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기도 쉬웠어. 그러니까 우리 집 가훈도 바보 같았던 걸 인정할게. 아랫집에서 하도 시끄럽다고 찾아왔을 때 네가 물어봤던 것 같아. 유치원에서 시켰었겠지. 남에게 피해 주지 말자. '남'은 너무 넓었어. 그냥 쉽게 잠을 자지 못하는 아이였는데. 윗집의 우당탕 소리에 깨어나 엉엉 우는 아이를 보고 올라온 피곤한 아랫집 부부에게 피해 주지 말자. 그러니까 집에서 뛰어다니지 마! 나가 놀란 말이야- 가 그 시절의 좀 더 분명한 가훈이었겠지. 지금이라도 바꿀까? 늙은이가 되어 꼴사납게 엉엉 울기 전에

터미널이 붙어 있는 백화점의 작은 서점에서 험난한 세상, 등쳐 먹히지 않고 살아가는 법! 을 알려준다는 책들이 모여있던 책장을 바라보다가 우연히 반가운 책을 발견할 때의 서러움을 가만히 둘 수 없었어. 잘 마시지 않는 콜라들이 진열된 냉장고에 마지막으로 남아있었던 라임 콜라처럼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포기와 숨기지 못했던 울음들로 뭉개진 머리가 네가 찾는 것은 그곳에 없다고 말해도 모두가 떠나버린 자리에서 다시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내가 열지 못하는 비밀 서랍은 없는지를 주어진 시간 동안 꼭 주인을 잃은 강아지처럼 엉엉 울며 돌아다니지. 무얼 찾는 것이 아니야.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라는 거지. 너 같은 애는 안된다. 너는 왜 서러운지도 분명하게 말해낼 수도 없잖아. 터진 주둥이로 할 줄 아는 건 돼지처럼 처먹는 것 밖에 없지. 백화점의 빵집에 줄을 선 사람들보다 사람이 없는 곳, 다른 정육점보다 살이 많이 붙어 있는 돼지등뼈를 파는 식자재마트의 정육코너처럼 시간을 여유 있게 잘라내는 곳, 잠깐 숨어 있어야 할 때라는 신호들이 찾아올 때 내 머릿속을 한가득 채워버리는 곳. 나는 아무것에도 눌어붙어있으면 안 되나 봐.

터진 주둥이를 얼굴에 달고 온 사람이 말한다. 먼 곳에서 자빠진 것이 뭐가 자랑이라고, 남들 보이기 부끄럽지도 않냐 말해서 미안해. 연말이라고 회식을 했어. 다들 담배를 피운다고 나가는 길에 나는 집에 잽싸게 돌아갈 생각이었지. 서두르다가 경계석을 보지 못하고 시원하게 넘어졌지 뭐야. 그래도 팔과 다리로 충격을 나누어서 다행이지. 강냉이는 깨지지 않았냐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회식장소에서 가까웠다면 산업재해는 아닐까? 정말 가기 싫었다고 우겨 봐. 휴가를 받아 익산으로 넘어가 한 달 살기를 하는 거지. 터진 주둥이 딸이 터진 주둥이로 잘도 시부리는구나. 한 달 살기 타령은 끝나지를 않네. 너무 가까워지면 지금처럼 좋아하는 장소로 남지 않을 것을 알지 않니. 조금이라도 움직여보기 전에 진지해지는 것이 문제야. 한두 발짝 가까워진다고 모든 것이 변하는 건 아닌데. 하루 이틀이 아니라 사나흘 있어 볼 수도 있잖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서로에게 피해를 주고받으며 살고 있는 걸. 피해 주지 말자로 말을 닫지 않고 쉽게 열 수 있는 문을 만들었어야 해. 아이는 시끄러워서 잠을 자지 못한 것이 맞을까. 잘 맞지 않는 베이비오일로 몸이 간지러웠던 건 아닐까. 무서운 꿈을 꾼 것은 아닐까. 오늘 먹은 이유식이 너무 맛있어 조금 더 먹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이를 한번 만나볼걸. 그들의 피곤함을 조금이라도 지워볼 수 있는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볼걸. 가만히 멈춰있지 말 걸.

정형외과에서 받아왔었던 오래된 손가락 보호대를 벽장에서 다시 꺼내와 아프다는 팔에 끼우고, 내일 멀쩡한 척하며 일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 잠든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부어 있는 입술은 꼭 누군가에게 얻어터진 모습 같잖아. 같이 병원에 가자는 이야기로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우리와 우리와 함께 살아있었던 과거의 시간들이 미웠다. 벌에 물린 강아지 같아. 입술이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너는 피딱지까지 붙어 버린 입술이었는걸. 너보다는 빨리 나을 거야. 나는 엉엉 울고 옆에 있던 사람에게 약국의 위치를 물었어. 엄마는 울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먹고 싶다던 치킨까지 사 왔지. 누가 이긴 거야? 나는 시간에게만 내 몸을 맡기지 않았잖아.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가만히 누워있는 모습이 여전히 미워. 다음 날 아침 평소와는 다르게 우아하게 국수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럴 때에 상견례 같은 것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결혼 생각이 없어 미안하군! 툭 던진 말에 딱딱한 공기가 살짝 풀어진 것을 느꼈다. 터진 주둥이로 말을 하고 밥을 먹고 사람을 미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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