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120화 / 12장 첫번째, 시험
장편소설 빛의 여정 120화 / 12장 첫번째, 시험
"가장 깊은 심연에서 가장 큰 울림이 나온다. 외부의 어둠과 내면의 어둠 사이에 방랑하는 자여. 그대를 직시하라. 돌아서지 말고 온전히 바라보라. 그리하면 빛께서 인도하시리라" - 전투 수도사 데라닐
둘째 주도 마찬가지로 로이딘 일행은 별 다를 게 하나 없는 지루한 혹은 피곤한 길 위에서 하늘과 숲을 여러 차례 의미없이 바라만 보고 달렸다. 로이딘은 가끔 목걸이로 찬 주머니를 살펴보면서 조각들이 잘 있는 지 살펴보곤 했다. 다음 주 쯤이면 바슬라에 도착할 수 있겠지란 목표의식을 공유한 채 세 마리의 말 그리고 세 명의 전투 수도사는 공기를 가르고 땅을 밟고, 걷고 달렸다.
둘째 주의 토요일이 끝나고 드디어 셋째 주를 맞이 할 무렵엔 모닥불 앞에 앉아있는 수도사들의 모습은 흡사 몇 일은 굶고 감옥에 갇힌 죄수 같았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났고 루네의 묶은 머리는 여기저기 엉켜 뒤쪽이 산발이 되어 있었다. 시테온의 말대로 "저 지긋지긋한" 건빵은 얼마 남지 않아 아끼고 쪼개가며 물에 적셔 허기를 진통제처럼 잠시나마 달랬다. 간혹 운이 좋은 날이면 루네가 사냥을 해서 토끼를 잡아오기도 했지만 저번처럼 사슴은 보이지 않았다. 한 번은 밤 중의 멧돼지가 돌아다녀 코로 그들의 야영지 근처를 뒤집어 놓고 있을 때 루네가 단단히 무장하고 잡으러 가려 했으나 로이딘이 너무 위험하다며 말리고 말려 그녀를 제 자리에 앉혔다.
이그네움 조각도 빵 더미처럼 얼마 없어 얼마까지 적게 쓰더라도 불이 잘 붙나를 실험 해보고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에도 격렬하게 반응하는 이그네움이 감사했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틀이 다시 지나고 눈을 뜬 화요일 아침. 이제 곧 셋째 주 동안 달려온 그들에게 바슬라의 도시 성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잘 먹지 못해 몸이 가벼워진 세 명은 그래도 마음도 같이 점차 가벼워지고 있었다. 각자 도시에 가면 무엇부터 할 지 희망사항을 이야기했다. 루네가 말하길
"일단..여관에 가서 겨울 수수 수프든 뭐든 뜨끈하고 걸쭉한 죽을 원해. 그렇게 속을 달래고 멧돼지 고기를 조금 뜯고 싶은데? 수도원의 고기가 아른 거리네"
시테온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비몽사몽한 상태로 안장 위에서 졸며 말했다.
"야, 너는 뭐 맨날 먹을 것만...하긴 배고프긴 하네. 그래도 나는 제대로 된 침대에 간만에 허리를 눕히고 싶네. 너는 어때 로이딘?"
로이딘은 꾀죄죄한 얼굴에 미간을 찌뿌리며 앞을 보다가 말했다.
"밥, 잠 그리고 충분한 밥과 충분한 잠"
그의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정오 쯤 얕은 냇가를 따라 물을 조금 받으려다가 너무 탁해서 다른 곳을 알아봐야 했다. 다들 말에서 내려 끼니를 떼우고 삭막한 북쪽 땅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냇가가 보이고 북쪽의 이끼들이 보이기 시작했단 것은 바슬라가 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변한 풍경에 긴장한 건지 잠시 돌에 앉아 쉬던 그들은 신발을 점검하거나 장비 상태를 살펴보았다. 물 주머니가 모두 홀쭉해서 로이딘은 수거하고 흐르는 시냇가를 멀리까지 바라보았다. 역시나 앞에는 계곡과 바위. 거리가 조금 있어 보였다. 로이딘이 시테온과 루네에게 물을 뜨러 간다 말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로이딘이 달려가서 물을 떠오기만을 기다리면서 할 일들을 했다. 루네는 고삐들을 잡고 말들을 풀이 많은 곳으로 인도해 먹게 했다. 시테온은 그간 쟁반으로 쓰고 있었던 방패를 닦아냈다.
짙은 갈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이끼들 그리고 스산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북쪽 나무들이 저주받은 추위를 견디며 서 있었다. 올라 갈 수록 냇가의 물들이 살얼음이 끼어있었고 점점 물이 맑아지는 것을 본 로이딘은 계곡 안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가니 11시 방향에 동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동굴까지 들어가기는 귀찮아서 도중에 쭈그리고 물을 채우려 했지만 깊이가 되지 않았고 내려오는 물줄기가 영 아니였다. 그렇다고 안쪽에도 자리한 호수마냥 깊은 물까지 가기에는 죽어있는 덩쿨들과 바위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굴 안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졸졸졸 소리에 따라 동굴에 들어온 로이딘. 그의 앞에는 천장이 뚫려 물이 흘러 고이고 흐르고를 반복하는 어디서 본 듯한 그리고 익숙한 위치의 물 웅덩이가 놓여져 있었다. 저 웅덩이는 로이딘이 검은 불에 기절 했을 때 꿈에서 마주한 웅덩이가 아니였던가? 순간 그의 등골이 스산해졌고 그대로 멈춰선 채로 무슨 상황인지 싶었다. 천장이 뚫려 흐르는 물 소리가 뭔가 더 요란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흘렀을 까? 가만히 촉각을 곤두세운 채 있던 로이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야 긴장을 풀었다.
그런 동굴 속 비슷한 모습들이 겹쳐서 착각했나하고 그는 물 주머니를 들고 웅덩이로 향했다. 이렇게 깨끗하고 투명한 물이 있다니. 심지어 마시기 좋게 차가운 것 같았다. 그는 흐르는 물에 손을 모아 채워 들이켰다. 목넘김까지 훌륭해서 개운함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시테온과 루네에게 물이 담긴 주머니를 선사하면서 생색을 좀 낼 생각에 흥겨웠다. 마개를 빼고 가죽으로 만든 물 주머니를 가져다 대었다. 안쪽에서부터 차오르는 물을 기다리며 동굴 내부를 살펴보았다. 분명 꿈 속에선 로이딘이 웅덩이 근처에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누워있던 넓은 바위도 의심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똑같은 위치에 있었다. 설마, 피데라께서 상기시키는 차원에서 이곳으로 인도하신 걸까? 덕분에 물도 좀 챙기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두 개의 물 주머니를 채운 로이딘은 마지막 남은 물 주머니를 들고 떨어져 흐르는 물 줄기에 가져다 대었다. 가기도 바쁜 데 얼른 채우고 가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정리를 마친 로이딘이 곧 마개를 닫고 튼실해진 주머니들을 안은 채 들어왔던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런데 한 걸음 한 걸음씩 발을 떼자 소리도 점차 크게 울렸다. 동굴 전체가 울리고 있었다.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로이딘은 크게 놀라며 순간 달리고자 했으나 굉음과 함께 동굴의 입구가 무너져버렸다. 그의 눈 앞엔 어둠만이 마주하고 있었다. 이어 벽이 흔들거렸고 석순들이 쪼개져 떨어졌다. 천장의 구멍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파도처럼 맹렬하게 흘러 넘치기 시작하더니 로이딘의 발을 적시며 닫혀 버린 입구까지 나아갔다. 무너지거나 물이 차거나, 살기 위해 어디로 도망쳐야 하나 로이딘이 서성거릴 때 땅이 갈라졌다. 땅이 크게 갈라지면서 아귀를 벌리는 듯 했고 지상에 있던 모든 것들을 삼켜 버렸다. 로이딘도 그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빛의 여정 5권, 121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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