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을 수반한 용기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251

by 포텐조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이백오십 일 번째



katt-yukawa-K0E6E0a0R3A-unsplash.jpg

초등학생 때는 질문거리가 투성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중고등학생이 되자 열심히 선생님의 말씀에 필사만을 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로 질문하거나 그 의견에 대해 함부로 반박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1학년 때 교양과목을 들었을 때를 기억한다. 문제에 대해 기억이 안 나지만 내 의견을 내기 위해 열심히 작성해서 제출했다. 주관식 서술형 문제였기 때문이다.




aida-l-l38IwM-UufU-unsplash.jpg

다음 주 강의시간에 격노한 교양과목 교수는 누구라고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나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나를 비판하고 있음을. 내용은 부자는 더욱 기부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서술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교수가 당시 뭐 잘 나가는, 그리고 수업시간 대부분이 자기 딸이 스카이를 다니고 자기는 작품활동을 하며 사업하고 잘 나가고 있다는 자기 자랑 시간이 주로 많이 차지 했었다. 나는 그 부분을 오히려 고무적으로 보았고 교수가 부러웠다.


그래서 아무 감정 없이 저렇게 잘 나가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기부하면 우리 세상이 좀 더 좋아지지 않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인지 몰라도 그런 글을 적었는데 교수 입장에서는 되레 비판으로 들려왔나 보다. 자기 호주머니에서 나가기 싫어하는 건 당연하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씁쓸했다. 돈이 많다는 이유로 자기 자랑 시간을 교양과목으로 내세우는 학교도 우스웠고 그런 사람을 교양과목 교수로 앉혀 놓은 것을.


그런데 나의 문제점도 있긴 했다. 교수의 말도 물론 일리 있었다. 돈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상관없이 기부는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게 비판의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맞는 말이다. 자기가 어떤 입장에 있던지 물질적 기부를 하거나 이타적인 봉사활동을 하며 사회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긴 하다. 그래서 그런 점을 볼 때 수동적으로 너무 살아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manuel-QvLscKk2s5c-unsplash.jpg

흔히 응급처치를 교육받을 때 쓰러진 사람의 가슴 정중앙을 누르고 압박하기 전엔 단순히 다른 이들에게 소리만을 치지 않는다. 특정 누군가를 가리키며 구체적으로 어떤 옷을 입은 사람이라 말하며 119에 신고해 달라고 말한다. 공공장소에 누가 쓰러져도 군중 속 한 사람으로 책임의식이 옅어진 사람들이 멀뚱멀뚱 지나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대표적으로 뉴욕 한복판 대낮에 살해를 당한 여성의 이야기는 남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죽음을 맞이했다.


적극적인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라고 생각하는 서구권에서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물며 집단주의적인 사고관을 내면화한 동양권은 오죽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을수 있다.) 그런데 각자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질문하는 시간에 나댄다라는 눈초리가 느껴질지 몰라도 "알 바 아니고 나는 궁금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도 궁금했을 질문이다."라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보면 이타성이 발휘하기 위해선 수동성에 반대되는 적극성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 책임지기 싫어하는 사회에서 용기 있게 먼저 선례를 보이며 자기의 길을 닦아나가는 사람들이 처음엔 욕을 무지하게 먹지만 나중에 결과가 좋으면 알랑거리며 손뼉 치고 그제야 환호하고 도중에 실패하면 그것 봐라 하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은 본인들 삶이 끝나는 날까지 이 세상의 주인공이 절대 아닐 것이다.

keyword
이전 05화산을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