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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롱 Jun 25. 2023

더 이상 대표님은 다시 해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노빠꾸,일에 대한 생각을 바꿨을 때 달라지는 것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회사에서 내가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은 '다시 해와'였다. 뭘 해가도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시작부터 빠꾸 당하기 일쑤였다. 일을 열심히 안 해서가 아니다. 내 선에서는 최대한 정성스럽게 마감기한에 맞춰 써 간 문서들이었다. 


다시 해오라고 해서 수정을 해 간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어지는 빠꾸 때문에 내 아이디어를 다른 팀에 넘겨주는 일도 생겼었다. 


열심히 준비한다고 했는데 늘 비슷한 피드백이 돌아오는 것을 알았는지 보다 못한 팀 동료들은 내게 ‘기획서 한 번에 통과하는 법’ 같은 링크나 그런 주제의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답답한 마음에 한 번은 대표님에게 왜 그런 말을 하시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물었다. 그러자 대표님의 답변은 이랬다.


"네 기획서를 보면 이 일을 왜 해야하는지가 잘 안보여."


그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다. 이 일을 왜 해야하는지는 오히려 나보다 대표가 더 잘 알아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반발심도 올라왔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이제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한다. 반복되는 피드백이 돌아왔던 이유도 알 것 같다. 좋지 않은 피드백이 모두 일에 대한 내 생각과 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최근 1-2년에 걸쳐 일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일을 대하는 태도도 생각대로 흘렀다. 참 신기하게 같은 일을 하는데도 이제는 다시 해오라는 피드백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나에게 ‘이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당연히 예전보다 성과도 좋고 인정도 받게 되었다. 


단지 일에 대한 생각을 바꾼 것 뿐인데, 그 이후부터 많은 것이 달라졌다. 


1. CEO의 입장으로 보면 달라지는 것들


‘다시 해와’라는 말을 듣던 시기에 나는 마케팅 팀의 기획과 운영을 맡아하고 있었다. 콘텐츠를 기획하는 것부터 제작해 발행하는 것까지 모두 내 몫이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팀 의사결정권자도 나이면서 동시에 일을 해야 하는 사람도 나였다. 그래서 나는 내 캐파가 되는 선까지의 일을 구획했다. 어차피 일손은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만을 기획하고 행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준에 비추어 써 내려간 기획서는 늘 빠꾸를 맞았다. 내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문서를 대표님은 매번 ‘중요한 게 빠진 문서'라고 하면서 알다가도 모를 피드백을 줬다.


“그러니까 중요한 거 뭐요? 여기 다 들어가 있는데.” 반복에 지친 내가 푸념을 늘어놓았던 어느 날, 대표님은 ”이 일은 단지 한 사람의 일이 아니야. 이 일이 회사 전체 그림 중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와 어떤 결과를 만들 수 있을지가 보여야 하는데 그게 하나도 보이지가 않잖아.”라는 뼈 아픈 말을 해줬다.


2. 내 기획서에 있던 것과 없던 것


내가 생각했을 때, 기획서는 문제랄게 없었다. 기획의 목표와 마감일자, 준비사항과 일정, 무엇을 만들지가 다 들어있었으니까. 게다가 내 기획서는 아주 꼼꼼한 문장과 그림 자료로 3-4 페이지의 적정선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늘 대표님은 문서의 가장 첫 페이지만 읽고도 다시 해 오라고 했고 공들여 쓴 뒷장의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선 심지어 ‘한 장짜리로 만들어 와 달라’라는 주문까지 했다.


그 이후로 나는 ‘한 장짜리’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게 되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한 장짜리로 만들 때, 무엇을 남길지를 뚫어져라 봤다. 대표가 말한 것처럼 전체 그림 중에 이 기획이 어떤 역할을 할지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생각 끝에 나는 왜 이 기획서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다다랐다.


“내가 이 기획을 왜 하고 있지?"


물론 대표가 시켜서 한 것이긴 하지만 이 기획을 썼을 때 내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지금까지의 일의 경과와 시장의 평가, 예상되는 반응과 맥락이 닿아있었다. 이 질문의 답을 곰곰이 생각하며 내 기획서를 다시 훑어보니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기획의 목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내가 하는 이 일이 무슨 의미인지, 또 회사는 왜 일을 해야 하는지가 정확히 설명되지 않은 채 ‘오늘부터 시작!’이라는 실무적인 운영방식만 작성되어 있었다.


3. 그렇지만 내가 그런 생각까지 해야 해?


'기획의 목적? 대표가 시켰으니까.'라고 대답을 할 것이라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일을 통해 뭔가를 이뤄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분이라면 한 가지 팁을 드리고 싶다.


그건 바로, 내가 우리 회사의 대표다.라는 마음가짐으로 기획서를 쓰면 된다는 것. 


물론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돈도 많이 안 주는데 대표의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하지만 대표처럼 빡세게 일하라는게 아니다. 지금은 대표의 마음가짐으로 기획서를 보자는 얘기다.  


기획서를 쓸 때, 잠깐 대표로 빙의를 해서 어떤 내용이 필요할까를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 


만약 내가 회사 대표라면 이번 콘텐츠 마케팅 캠페인은 어떻게 기획해야 할까?

왜 그렇게 해야 할까?

그렇게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을 나 혼자 다 할 수 없다면 어떤 팀의 도움이 필요할까?


전체적인 기획서의 맥락이 잡히면 대표님과 동료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가 그려진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정리된 기획서는 단순히 절차와 마감일자가 쓰인 기존의 기획서와 다르다. 내용도 많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실제로 대표가 말하는 한 장짜리로 축약할 수도 있게 된다. 


4. 대표의 빙의, 이제는 대표처럼 일하기


대표 빙의를 해서 대표의 시선으로 기획서를 쓰다 보니 자연스레 평소에도 대표의 시선으로 회사 일을 바라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내가 하는 일이 다른 팀의 어떤 일과 관계되어 있는지가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이메일을 통해 수집한 고객의 소리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고객의견 중 일부를 어떻게 제품개발에 더 녹여낼 수 있을까?

마케팅팀과 개발팀은 한 번도 같이 일해본 적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놓치고 있는 건 없을까?

그렇다면 이번 캠페인에는 개발팀의 주기적인 미팅을 포함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렇게 의식의 흐름을 좇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일의 한정적인 범위가 아닌 전사적인 차원에서의 큰 그림을 떠올려 보게 된다. 자연스럽게 다른 팀이 현재 하고 있는 일과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면서 정말 가끔씩은 부르지도 않는 그 팀의 회의에 나도 참여하겠다는 의견을 내게 되기도 한다.


그게 일만 늘어나는 것이지 뭐가 좋냐고? 


대표의 시선으로 회사 일을 하게 되면 어느 순간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이 대표님의 고민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예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회사 일을 바라보게 된다. 당연히 그걸 회사 대표님도 동료들도 알게 된다. 내가 하는 제안과 아이디어에 경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일에서 인정을 받게 되니 자연스레 보상도 좋아진다. 


5. 태도를 바꾸면 달라지는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에 대한 내 태도가 ‘나 중심’이 아니라 ‘회사 중심’이 된 후로, 고민하던 많은 것들이 해결되었다. ‘다시 해와’ 피드백도 없어지고 그렇게 받고 싶던 칭찬도 예전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내가 기준점이 되어, 나에게 유리한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일만을 기획했는데 지금은 회사가 기준이 되어 필요한 일을 구획하고 나 혼자 하기 어렵다면 도움을 청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팀과의 협업도 가능해지고 그로 인한 시너지로 더 큰 성과도 만들어가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전보다 더 일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른 팀에 업무 요청을 할 때, 회의에서 내 의견을 피력해야 할 때, 또 다른 회사와 미팅을 할 때 예전과는 다른 당당함이 생긴다. 


이건 다 일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꿨기 때문이다.대표는 아니지만 대표의 마음가짐으로 일을 바라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주변 동료들도 나를 그렇게 대한다.

일에 대한 태도를 바꾼 뒤, 다시 해오라는 말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이왕 하는 일 대표처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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