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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롱 Sep 11. 2023

내가 믿는 대로

15화

손 대표와의 만남 이후 시간이 꽤 흘렀다. 바쁜 연말이 지나 다시 연봉협상 시즌이 돌아왔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하면 연봉을 올릴 수 있을지가 화두였고 누가 얼마를 받고 있다고 하더라 식의 소문이 무성했다. 근거 없는 인상률이 그들의 입에서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서로 만족스러운 연봉협상을 한 적이 있었느냐는 떠보기 식의 질문을 던지면서 각자가 이번 연봉협상을 어떻게 치를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내 연봉을 떠올렸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연봉 인상을 목표로 일해 왔다. 하지만 입사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연봉협상에서 원하는 금액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어떤 때에는 동결, 작년에는 겨우 몇 퍼센트를 올려준다는 통보를 받은 게 전부다.


-언제 내가 협상해 본 적 있나. 말이 협상이지.


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책상 앞에 조심스레 붙여둔 두 개의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열정’과 ‘책임’. 예전보다 연봉인상 요구에 떳떳한 마음이 든다면 이 두 카드에 적힌 단어 덕분일 거라고, 이번에는 여느 때보다 열심히 일하지 않았느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자 문득 손 대표가 떠올랐고 한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버스정류장에 있을까.




다음 날 아침, 나는 손 대표를 만나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시간이 되자 저 멀리서 손 대표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멀리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었다.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딴짓 안 하고 일만 열심히 하면서 지냈어요. 주산 카드의 힘이 대단한 것 같아요. “


내 말을 듣자 손 대표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어땠는데요? “


“마치 부적을 손에 쥔 것 같다고 할까. 기분 탓인지 몰라도 그 카드를 받은 뒤부터 거기에 써진 것처럼 좀 더 열정적으로, 책임지며 지냈어요.”


그러자 손 대표가 재킷에서 또 한 장의 카드를 꺼내어 건넸다.


“이번이 마지막 카드예요. 김 과장님은 이미 많은 카드를 가졌어요. 하지만 이걸 갖게 됨으로써 조금 더 성장하게 될 거예요.”


“믿음.”


김 과장은 그 두 글자를 조심스럽게 읊조렸다. 두 단어가 어떤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을 믿는 태도예요.” 손 대표가 말했다.


김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랐다. 그저 좋은 뜻일 거라고 느꼈을 뿐이다. 손 대표는 그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이어서 설명했다.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믿어보세요. 믿는 대로 이뤄지니까. “


그 순간 김 과장은 당장 내일 있을 연봉협상을 떠올렸다. 손 대표를 만나러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 연봉협상안이 받아들여질까 의심하고 있던 걸 알고 말하는 걸까.


“내일 연봉협상인데... 좀 올려 받고 싶은데 될까요?”


“봐요. 벌써 의심하고 있잖아요. 된다고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김 과장의 자신 없는 목소리를 반박이라도 하는 듯이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한 만큼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고 하지만 한 번도 협상해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올려 받고 싶은데요?"


그 질문에 나는 농담하듯 말했다.


“앞자리가 바뀌는 게 제일 좋죠. “


하지만 나의 가벼운 대답과 달리 손 대표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우리 둘 사이에 갑작스러운 정적이 흘렀다. 이전에는 그런 적이 없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그는 잠자코 있다가 다시 진지한 말투로 얘기했다.


“목표라는 것은 원하는 수치가 정확해야 해요. 그리고 그걸 끝까지 믿어야 해요. “ 


“전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내가 말끝을 흐리자 손 대표가 다시 물었다.


“몇 퍼센트 인상을 목표로 정해야 스스로 믿겠어요?”


늘 연봉을 많이 받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어느 정도 얼마나 받고 싶은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 없었다.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봤자 소용없다는 식으로 시니컬하게 굴었으니까. 그래서 질문에 대답하기 앞서 버벅거렸다.


“그게... 지금보다 한 20%정도 올려 받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


손 대표는 끄덕였다.


“그걸 믿으세요.”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제가 한국을 떠나요. 앞으로 한 동안은 이 버스 정류장이 그리워질 것 같네요. 과장님의 목표가 이뤄지면 알려줘요. 연봉협상이라는 목표를 이루고 나면 그 이후에는 더 큰 꿈을 위해서 나아가셔야 할 거예요.”


"엇..."


나는 아쉬움에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그를 찾아올 걸.


그때 손 대표의 차가 들어왔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한 가지를 더 일러줬다.


“과장님, 그 카드 세 장을 꼭 간직해요. 그게 저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한 비결이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손 대표를 태운 차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뒤늦게서야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못했음을 알았다. 목표를 이룬 뒤에 다시 그를 찾겠다고 다짐하며 버스 정류장을 걸어 나온 순간,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역시나 말끔한 차림의 신사였다. 하지만 그 사람은 손 대표는 아니었다. 가벼운 발걸음이 내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어떤 표현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얼마나 들떠있는지 표정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익숙한 모양의 사원증도 눈에 들어왔다.


내 앞을 지나쳐 가는 그의 모습에서 나의 첫 회사 생활이 떠올랐다. 기대와 달리 모든 것이 버겁게만 느껴지던 그때, 누군가의 도움을 바랐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도 손 대표가 그랬듯이 누군가의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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