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과장님, PD님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데요?"
회의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PD는 소식이 없었다.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중요한 회의이니 늦지 않게 오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다시 전화해 봐."
PD가 올 때까지 나는 다른 팀 직원들을 앞에 두고 했던 얘기를 또 하며 시간을 벌었다. 목이 바짝 탔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몇몇이 먼저 미팅을 미루자고 제안했다.
그들 중 PD와 같이 일했던 한 명이 목소리를 낮춰 ’PD님 가끔 그러세요.‘라고 일러주었다. 그 말에 따르면 PD는 평소 빈번한 지각과 급작스러운 연차를 사용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지난번에는 지하철 타고 오다가 중간에서 쓰러져서 응급실 가느라 당일 연차를 썼고요. 또 얼마 전에는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회사 오다가 다시 돌아갔다고...원래 몸이 좀 약하신 분이에요." 나는 화가 났지만 그 이유를 듣고나니 뭐라고 말하기에 머쓱해져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 직원은 "일은 잘하시고 실력 있는 분이에요."라고 했다.
다 같이 모여 다음 제작 일정을 잡기로 했던 회의는 결국 잠정 중단되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던 PD는 점심시간이 넘어서까지 연락이 닿질 않았다. 나는 회의가 미뤄진 것보다는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직원들의 태도가 더 고민스러웠다.
-그동안 한 차장은 어떻게 관리했담,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해도...
생각이 깊어갈 때 즈음, 문자 한 통이 왔다. 나는 장문의 문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몸이 아프다는 사람을 당장 나오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몸이 아프다는데 어쩔 수 없지.
PD의 무단결근 이후부터 사무실 내에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마치 이어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몇 직원들이 갑작스런 병가나 연차를 사용했다. 그 영향인지 남아있는 직원들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무실 분위기는 점점 침체되었고 급기야 모두가 힘든 일은 어떻게든 피하려 들었다. 나는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성과를 내려는 내 마음과 달리 팀원들은 아주 느리고 무겁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 마음 같지가 않아요. 팀원들이 다 열심히 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손대표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여느 때처럼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꼭 아픈 직원이 생긴다니까요. 그걸 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요즘 회사에 일이 많은 편인가요?"
"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규모가 커요. 저는 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다른 팀 원들이 서포트를 제대로 못해주니까 죽겠어요."
"다른 팀 원들 일은 어떤데요?"
"잘 하는 것 같다가도 중간에 꼭...아휴, 다들 왜 그러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띈 채 말했다.
"이제부터는 과장님 일 뿐만 아니라 다른 팀 원들의 일도 관리를 하셔야겠네요. 원래 그 자리는 내 일만 잘하면 되는 자리가 아니에요. 팀 원들을 성장하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리죠."
"본인들이 잘 따라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다 챙길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팀 원들이 어떤 이유로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면 과장님이 도와야죠. 과장님도 어려운 일이 있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잖아요. 그래서 성장할 수 있었고요."
사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모든 것이 내가 열심히 해 얻을 성취로 여겼다. 과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것도 스스로 잘해 왔기 때문이었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하지만 분명,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고 전보다 더 나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성장을 도와 준 사람은 지금 바로 내 옆에 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김 과장님은 이런 고민을 하시던 분이 아니셨는데. 술에 잔뜩 취해 어떻게 하면 내일 한 잔 더 마실까를 고민하던 분이 지금은 많이 바뀌셨네요."
손 대표의 말을 듣고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상황이 바뀌어서 그런가 봐요."
그러자 손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는 과장님이 달라져서 그런 거예요."
손 대표를 만난 뒤부터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예전에 생각했던 고민들이 지금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고 날마다 잡던 술자리도 안 한지 꽤 되었다. 회사에서는 팀 원이 바뀌었다. 끊임없이 불평만 늘어놓던 안조은이 다른 팀으로 옮겨갔고 번번이 훼방을 놓던 한 차장도 퇴사했다.
"김 과장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아픈 직원들이 생기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셨죠. 그건 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에요. 중요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을 때 우리는 주로 피하려고 들죠. 눈앞에 있는 일이 너무 하기 싫어서 그냥 눈을 감아버리는 거예요."
"그게 몸을 아프게 만든다고요?"
"머릿속으로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도 우리의 무의식은 솔직하고 강렬해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힘든 일을 피하고 싶어 그럴 수 있어요."
"그럼 지금 이런 분위기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팀 원들의 일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하려고 하세요. 문제가 생길 때,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독려해 주세요.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내가 생각에 잠기자 손 대표는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말했다.
“그렇다고 직원의 일을 대신 할 필요는 없어요. 지난번 안조은 대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네가 안하면 그냥 내가 하겠다라고 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오히려 역효과에요. 지금부터 김 과장님은 팀 원들의 문제를 대신 처리해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할 수 있게 도와주고 또 기다려주어야 해요.“
다음 날, PD는 핼쓱해진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자신의 병가로 인해 일이 미뤄진 것에 대해 거듭 사과를 했다. 평소 같으면 PD에게 책임을 묻기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예상 밖이라는 듯 PD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자켓 안에 든 카드 두 장의 무게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