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친구에게 쓰는 편지
이재은/임지선, 성적표의 김민영
우리나라 고등학생이라는 게, 8시 등교에 10시 하교를 하다 보면 엄마 아빠보다 더 얼굴 많이 보는 게 친구다. 기숙사 살다 보면 하루종일 보는 거고. 안전거리 없이 그렇게 붙어지내다보면 걔의 습관이며 장단점 같은 것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다 알 것 같고. 깔깔거리며 웃다가도 막 싸우고, 서운한 게 쌓여도 또 계속 붙어있다 보면 풀리기 마련인데 말이야.
성인이 되었다는 건 더 이상 우리가 매일 얼굴 보는 사이도 아니고, 각자의 삶에 따로 던져저서 어떻게든 거기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나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여도 너는 왜 이렇게 변한 거 같은지. 서운함도 쌓여가고, 너한테 말 못 하는 일들도 늘어가고. 예전에는 신경 안 쓰이던 게 신경이 쓰여.
나한테는 까칠하고 못되게 굴면서 서운하게 만들고는
옆집 사람한테는 잘해줬을 니가 밉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친구들과 못 어울리고 상처받아서는 일기장에 밖에 못 털어놓은 너를 보면 말이야. 넌 왜 현실에 없는 말만 하냐고 까칠하게 굴고는 안 되는 데 도전한다고 애를 쓰고. 너도 나한테 말 못 하고 숨긴 속내가 있었다는 게, 내가 모르는 너를 알게 되면 기분이 그래.
너도 나를 견뎌준 날들이 있었을까. 그때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너도 알아서 넘어간 날들이 있었을까. 너도 나처럼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혼자 숲 속에 들어가 앉아있으면서도 문득문득 뒤를 돌아보며 내가 와주길 기다렸을까.
"깊은 숲 속 같은데 그런데 엄청 깊이 들어가서 사는 거야. 거기에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도 없고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근데 들어가기 전에 거기가 어딘지 몇 명한테만 말해두는 거야. 그러면 진짜 오래 지나서 있잖아. 거의 약초의 박사가 됐을 때쯤에. 아 이제 진짜 아무도 안 오겠구나 할 때쯤. 누가 찾아올까?"
그때의 우리는 항상 웃고 있었던 거 같은데. 물안경을 쓰고 자전거를 타면서 수영장에 온 기분을 느끼고 스케이트장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덤블링 연습하자고 했잖아.
푸딩 먹지 말라고 하면 내가 안 먹고 그냥 갈 줄 알아? 너가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를 줄 알아? 나는 햇반으로 경단도 만들고 푸딩도 먹고 너 일기장도 볼 거야. 깊은 숲 속에 틀어박힌대도 그럴 거야.
앞으로 뭘 하든 그때 우리 같았으면 좋겠어.
너는 한국인이 아니라 혼혈이었으면 해.
잘 지내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