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에게 안부 전화가 왔다. 친구의 아들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는 유치원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만 별로 힘들어하는 내색 없이 잘 다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한 마디 덧붙이기를
“나보다 더한 애가 나와서 나를 아주 힘들게 하는 게 문제지.”
“뭘 어떻게 하길래?”
“지금 몇 시냐고 물어보길래 7시 40분이라고 했더니, 37분인데 왜 40분이라 했냐고 따져.“
“어머, 이제 초등학교 들어갔는데 벌써 시계를 볼 줄 알아? 시계 보는 법은 2학년 돼야 배우는데.”
“무슨 소리야, 요즘 애들이 얼마나 빠른데! 예전보다 평균 2년은 더 빨라.”
친구는 아이에게 과도한 사교육이나 조기교육을 시키는 스타일은 전혀 아니다. 작년부터 그림 책 읽고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일대일 수업을 줌으로 시작했다기에 코로나로 친구들과 노는 시간도 줄어들고, 곧 학교 들어갈 나이도 되었으니 이제 조금씩 시작하는구나 싶은 정도였다.
시계를 볼 줄 아는 8살을 두고 놀란 나에게, 예전과는 아이들이 보고 듣고 배우는 환경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고 친구는 강조했다. 아이들은 놀랍도록 거기에 적응하기 때문에 과거의 인지교육 속도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도 했다. 안가르친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계를 볼 줄 아는 아이니 두자리 숫자까지도 당연히 알 터였다.
“그런 애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기역, 니은부터 가르치니, 완전 퇴행인 거지.”
친구의 입에서 ‘퇴행’이란 단어를 들으니 나는 갑자기 욕을 먹은 듯한 기분에 빠졌다. 내가 일하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국가가 모국어 교육을 책임지도록 운동을 펼친 덕분에, 2017년부터 초1 한글 수업이 27시간에서 68시간으로 늘어났고, 이는 우리 단체의 큰 성과라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이 친구도 2019년, 우리 단체의 영유아 학부모 간담회에 참여한 적이 있고, 저간의 사정을 대략 들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상담하러 학교에 갔더니 담임은 ‘집에서 받침 있는 글자 연습시키라’고 해. 처음 들을 때는 뜨끔했지. 내가 애를 붙잡고 시키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근데,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더라고, 할 말 없으니까 모든 부모들한테 똑같이 하는 말이었어.”
그제서야 나도 정신을 차리고 말을 꺼냈다. 1인당 사교육비만 해도 서울 중산층 가정은 지방의 작은 도시에 비해 평균 2-3배를 더 쓰니, 지역이나 부모 환경에 따라 아이가 배우고 깨우치는 속도에는 차이가 클 것 같다고 말했다. 한글을 제대로 모르고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우리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실은 적지 않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좀 산다 하는
나라 중에 모국어 교육을 책임지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말할 때는 목소리 톤도 달라졌다. 평소 합리적인 친구는 내 말에 금세 수긍했다.
“하긴, 나야 내 주변에 비슷한 아이들밖에 볼 수 없으니까, 지방과는 차이가 정말 크겠지. 뭘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
얼마 전 길을 걷다가 영어로 대화하는 어린아이와 엄마를 본 적이 있다. 비슷한 장면을 보는 또래 엄마들은 어떤 기분일까. 저런 아이는 전체 아이들 중에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설령 그 아이들이 무시 못할 숫자라 하더라도 저 아이가 유아 대상 영어학원(영어유치원)에서 영어를 배우는 동안 유아기가 아니면 터득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인생에서 부모는 아이를 위해 과연 무엇을 선택하면서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