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양 문명은 현대 사회를 이루고 있는 중추적인 문명이다. 현대 사회의 두 기둥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모두 유럽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서양문명을 설명하는 가장 단적인 표현은 '직선'이다. 왜냐하면 서양 문명은 인간과 문명/문화/사상/기술 등이 항상 한 방향으로 진보/발전한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리아스>는 이러한 믿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책이다.
2. <일리아스> 주인공은 아킬레우스다. 그렇기에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 아킬레우스는 작중 2가지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하나는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 필멸자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는 불멸자로의 변화다. 또 다른 하나는 감정에만 충실한 야만인의 상태에서 문명인으로의 변화이다. 개인적으로 이 2 가지 변화는 그리스 사람들이 문명을 바라보는 관점을 상징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발전과 진보. 열등한 것에서 우월한 것으로의 진화. 그렇기에 작중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사람들의 믿음을, 그리고 그 믿음에 기반을 가진 그리스 문명을 상징하는 존재다.
3. 그리스 사람들에게 불멸은 인생의 목표였다. 불멸의 명성은 인간이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그중에도 영원함을 간구했다. 그들은 영원함, 즉 불멸을 얻기 위한 방법을 찾아낸다. 그것은 ‘끝내주게’ 죽는 것이다.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싸워서 자신의 이름을 남겨서, 불멸의 명성을 얻어 후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려고 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 영웅들에게 불멸의 명성은 최고의 가치이다. 결코 이룰 수 없는 가치로의 도전과 모험을 상징하기 때문이며, 이를 위해서 영웅들은 언제나 스스로를 개발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리아스>를 보면, 파트로 클로스의 죽음 때문에 복수에 미치기 전까지 아킬레우스가 원한 것도 불멸의 명성이었다. 어머니 테티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트로이아 전쟁에 참여한 것도 불멸의 명성을 얻기 위함이었다. 심지어 그는 파트로클로스처럼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하나 지금은 훌륭한 명성을 얻고 싶어요.” 라며 죽음을 각오하고 불멸의 명성을 얻으려고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는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300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아킬레우스를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불멸을 얻은 것은 그가 신이 되어서가 아니다. 그가 단순히 전쟁에서 엄청나게 잘 싸운 전사 여서도 아니다. 그가 불멸을 얻은 것은 그가 죽기 전까지 한 인간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진전, 발달, 발전, 향상, 진보의 힘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다운 인간으로의 탄생이다.
헥토르를 죽이러 가는 아킬레우스
4.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 호메로스는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이라고 말한다. 이후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군이 트로이아 군에게 전투에서 밀리도록 제우스에게 기도한다. 제우스는 이 기도를 들어주었고, 결과적으로 그리스 군은 그들이 타고 온 배가 있는 해안가까지 밀려나게 된다. 그럼에도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군을 위해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촌이자 친구인 파트로클로스가 트로이의 왕자이자 총사령관인 헥토르에 죽은 것이 분기점이었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앞에서 아킬레우스는 “검은 먼지를 움켜쥐더니 머리에 뿌려 고운 얼굴을 더럽혔고” 동시에 “제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슬퍼했다. 그는 결국 트로이 성까지 진격한 가운데 헥토르와의 결투에서 승리해 헥토르를 죽였다. 헥토르의 시신은 아킬레우스의 전차에 매달려 능욕당했다. 아킬레우스는 철저히 감정의 노예였다. 분노에 취했고, 복수에 눈이 멀었다. 그는 최고의 전사이자 라이벌에 대한, 상대방에 대한 존중,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예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복수를 달성한 후에도 그는 자신만의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여전히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슬픔과 분노가 그의 내면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점까지만 놓고 보면, 아킬레우스는 인간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거칠게 말해, 그는 동물과 다를 것이 없었다.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아킬레우스
5.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변화했다. 그것도 극적으로. 그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감정에서 이성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 변화가 가능케 한 인물은 다름 아닌 헥토르의 아버지이자 트로이의 왕인 프리아모스였다. 그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였다. 아들의 시신만이라도 되찾기 위해서 그는 적군인 그리스의 진지로 향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원수가 되어버린 아킬레우스를 대면했다. 그리고 그에게 아들 헥토르의 시신만이라도 돌려주기를, 최소한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이야기한다. 아들을 죽인 원수에게! 지금까지 봐왔던 복수심에 눈이 먼 아킬레우스라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되찾아 가는 것을, 그리고 그리스와 트로이가 헥토르의 장례 동안 휴전을 하는 것 까지 허용한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의 만남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그는 자신의 아버지 펠레우스를 프리아모스와 겹쳐 본다. 펠레우스는 아킬레우스를 다시 만날 수 없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죽을 운명이기에. 아들을 잃을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에게 공감한 것이다. 자신의 감정이라는 껍질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동정과 연민을 느끼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아킬레우스가 프리아모스의 용기에도 감복하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아들을 다시 보기 위해서 원수에게 무릎을 꿇는 모욕을 감수할 수 있는, 홀로 적진을 찾아올 수 있는 그의 용기에 비록 적이지만 존경심을 품은 것이다. 이는 헥토르의 시신을 철저히 유린한 아킬레우스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킬레우스의 변화는 그가 비록 트로이 전쟁에서 사망해 끝내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그가 불멸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다. 동물과 다름없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 인간다움을 찾은 그의 모습에 그리스 사람들은 열광한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충분히 잘 싸우는 전사였다. 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인간다운 인간으로 재탄생한다. 이러한 그의 변화는 직선적이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며 결코 그 전과 같아질 수 없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아킬레우스는, 그들의 믿음에 가장 잘 부합하는 영웅이었다. 그렇기에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에서 시작해 아킬레우스가 인간성을 되찾는 프리아모스와의 만남에서 마무리된다. 그리스 인들에게는 그의 죽음도, 트로이의 목마도 중요하지 않았던 셈이다.
6. 이처럼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라는 불멸의 영웅을 빌려서 좁게는 그리스 인들의, 넓게는 서양 사람들의 가장 강력하면서 기본적인 믿음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발전하는 존재고, 그렇기에 인간이 만들어 낸 이 문명(=그리스 문명/서양문명)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진보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낱 전설일 수도 있고,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일리아스>가 꾸준히 살아남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도 <일리아스>가 서양 문명의 시작과 핵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리아스>가 고전인 데에는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다.
*이 글에 삽입된 이미지는 2004년도 작품인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라는 영화인데, 개인적으로 <일리아스>의 핵심을 가장 잘 영상화 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본다면 더욱 재밌게 <일리아스>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