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CU에서 <토르>는 가장 이질적인 시리즈였다. 북유럽 신화라는 원전의 서사를 바탕으로 한 판타지 영화를 과학적인 설정의 SF 세계관 내에서 풀어내다 보니 서로 다른 장르 사이에서 불협화음이 새어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토르: 천둥의 신>이나 <토르: 다크 월드>에서 아스가르드, 이그드라실, 바이프로스트 등의 장소들은 마법적인 공간이 아니라 외계 문명의 과학적 산실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막상 그 안에서 활동하는 오딘, 토르, 로키, 헤임달 등의 인물들은 마법적인 권능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니 토르 시리즈는 한 영화임에도 마치 두 개의 서로 다른 영화를 억지로 합쳐진 듯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2. 판타지와 SF라는 장르의 본질 상 이는 예견된 문제일지도 모른다. 판타지 장르 서사의 핵심 정서는 경외심과 경이로움이다. 판타지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만났을 때 느끼는 경외감을 스토리로 풀어내고 영상에 담아내는 장르다.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에서 엘프들의 왕국이 등장하는 장면이나, <해리포터>에서 주인공들이 호그와트에 처음 들어가는 씬에서 느껴지는 감정과 같은 것이다. 반면 SF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이 있을 때 이를 가능한 한 최대한 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내러티브에 담겨야 한다. 애초에 공존할 수 있는 스탠스가 아닌 셈이다.
그러니 1편인 <토르: 천둥의 신>과 2편인 <토르: 다크 월드>에서 불협화음이 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어떤 대상은 아름답게 경외감의 시선으로 표현하면서(토르와 아스가르드에서의 서사) 어떤 장면들은 과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으니깐(주로 지구 쪽 인물의 서사에서). 하지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연결과 우주로의 확장을 위해 <토르: 라그나로크>는 페이즈 3에서 가장 중요하고 성공해야 하는 영화였다. 따라서 시리즈 특유의 불협화음을 <토르: 라그나로크>는 반드시 해결을 해야 했고,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중대한 변화를 선택한다. 바로 SF와 판타지 중 판타지에 집중한 것이다.
3. <토르: 라크나로크>는 판타지 장르의 서사에 집중하기 위해 연인인 제인 포스터, 토르의 친구들, 지구 쪽의 서사와 심지어 토르의 머리카락까지 전부 내다 버린다. 대신 새로운 캐릭터인 헬라와 발키리의 등장시켜 판타지 장르오의 지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뚜렷한 색채 대비, 유화 그림을 연상시키는 강한 터치감과 강렬한 광원, 그리고 의도적인 슬로모션 등의 방식으로 연출된 발키리와 헬라의 과거가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다. 전작들과 달리 유달리 '신'의 정체성과 신의 '권능'을 강조하거나, 닥터 스트레인지와 '마법'을 등장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여전히 <토르: 라그나로크>가 SF, 그중에서도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 작품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특징을 우주선, 행성, 블랙홀 등의 도상적 요소에만 한정시킨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연상시키는 흥겨운 음악과 (좋은 의미로) 정신없는 유머의 등장은 덤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라그나로크>는 판타지와 SF 서사 간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한다.
실제로 <라그나로크>는 마법적이고 신화적인 분위기가 강한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 대사를 통해서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거나 설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그드라실과 우주에 대해, 컨버전스에 대해서 굳이 과학적으로 설명을 덧붙이다가 자가당착에 빠진 전작들과 다른 행보다.
또한 <라그나로크>는 오딘의 죽음 - 묠니르의 파괴 - 토르의 조난- 헬라의 아스가르드 침입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듯 영화 내 사건들을 빠르게 이어가고 있다.이처럼 에피소드 간의 짧고 빠른 연결은 영화의 리듬도 빠르게 만들고 이질적인 장르의 결합이 두드러지지 않게 만든다. 그 결과, <토르: 라그나로크>는 길을 잃거나 흔들리지 않고 북유럽 신화의 라그나로크 서사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4. <토르: 라그나로크>은 시리즈 중에서 북유럽 원전 신화의 내용을 가장 충실히 따라간 작품이다. 신화 속 라그나로크는 로키, 수르트, 헬라, 펜리르 등이 아스가르드를 공격하면서 시작된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이에 맞서 싸우지만 오딘과 토르가 전투 중에 사망하는 등 신들의 죽음과 세계의 종말은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최후에 한 명의 남신과 한 명의 여신이 살아남고 이들이 새롭게 미래를 만들어 간다. 원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토르: 라그나로크>는 세부내용이 각색되었음에도 신화의 전체적인 전개를 충실히 따라가며, 토르의 마지막 선택마저도 원전 신화의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북유럽 신화는 다른 지역의 신화와 조금은 다른 특징을 지닌다. 그리스 신화와 같은 다른 신화가 신들의 영원함과 위대함을 강조한다면 북유럽 신화는 마지막에 일말의 희망을 보여주지만 전체적으로는 필멸, 필연, 비극의 신화다. 아무리 신이라 해도 자신들의 죽음, 세상의 멸망을 막을 힘은 없기 때문이다. 신화 속 오딘은 한쪽 눈과 세상의 모든 지식을 맞바꾼 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신이 된다. 하지만 이후 그는 술주정뱅이가 되어버린다. 왜? 자신과 신들의 파멸을 내다봤고, 그 파멸을 막을 방도가 없다는 것도 내다봤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전 신화의 비극성과 약간의 희망까지도 잘 살려냈기에 <토르: 라그나로크>가 마침내 유기적으로 이어진 영화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1편과 대비를 이루는 토르의 대관식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5. 그럼에도 <토르: 라그나로크>에 아쉬움이 전혀 없지는 않다. 라그나로크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여 모르는 북유럽 신화를 모르는 관객들이 영화만 보고 이해하기는 힘들었던 점, 사카아르 행성에서의 내용이 다소 길어서 아스가르드에서의 전개가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점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은 환골탈태한 토르의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 일정 부분 만회해 준다. 또한 시리즈를 통틀어 최고의 빌런이라 할 만한 헬라, 시리즈의 감초 로키, 카리스마 넘치는 발키리, 성장한 헐크와 같은 캐릭터들의 매력은 아쉬움을 잊기 충분하다. 이에 더해 토르 VS 헐크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팬들에게 잊지 못할 영화임은 분명하다. 보기 드물게 트릴로지에서 가장 뛰어난 3편인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보기 드물게 깔끔하고 진일보한 시리즈의 3편
<토르: 러브 앤 썬더>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
배우: 크리스 햄스워스, 나탈리 포트만, 테사 톰슨
개봉 예정일: 2021년
<토르> 시리즈의 4편으로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토르의 여정을 다룰 예정이다.
제인 포스터 역의 나탈리 포트만이 <토르: 다크 월드> 이후 처음으로 시리즈에 복귀할 예정이며, 여성 토르가 등장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르 역의 크리스 햄스워스와 발키리 역의 테사 톰슨 역시 복귀한다.
메가폰은 <토르: 라그나로크>의 감독이자 '코르그'의 배우인 타이카 와이티티가 잡는다.
MCU의 페이즈 4에 속하는 작품이자 MCU에서 최초로 제작하는 단독 히어로 시리즈의 4번째 영화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는 총 3편이 나왔고, 어벤져스는 단독 히어로가 아닌 팀업 영화다)
<토르:라그나로크>,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거치면서 신화적 서사의 완결을 이룬 토르. 그 토르가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과 함께 떠날 새로운 여정, <토르: 러브 앤 썬더>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