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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Dec 25. 2018

위대한 개츠비

순수해서 위대한 그대


나의 삶은 저 빛처럼 돼야 해. 끝없이 올라가야 하지.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을 뽑을 때 항상 포함되는 작품들 중 하나이다. 그것은 '개츠비'라는 캐릭터가 그 자체로 미국의 모든 것(특히 1920년대의 미국)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서부 출신의 개츠비가 동부로 이주해서 경제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사회적으로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톰 뷰캐넌의 대사를 통해 갑작스러운 부자들에 대한 불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처절한 몰락을 맞이하는 모습은 마치 유럽에서 이주하여 미국을 세우고 1차 세계 대전을 통해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으나 결국 대공황으로 인해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는 미국인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음을 모른 체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영화한 <위대한 개츠비>(2013)에 더 많은 관심이 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이러한 식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과의 연결고리를 크게 부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철저히 배경으로 삼는다. 대신 개츠비라는 캐릭터가 중심에 위치한다. 사실 '위대한 개츠비'는 개츠비라는 캐릭터 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소설이다. 특히나 '왜 개츠비가 위대한가'라는 지점에서 이 소설을 바라볼 경우 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이를 바즈 루어만 감독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개츠비에 캐스팅하고, 닉 역할을 토비 맥과이어에게 맞김으로써 영화 내에서 묘사하는데 최선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우선 개츠비라는 인물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작품 안에서 개츠비는, 결론적으로 말해, 처절히 실패했다. 그는 자신이 항상 꿈꿔왔던 데이지와의 사랑을 이루지도 못했고, 자신의 사업을 지키지도 못했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생전과는 달리 아버지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오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처절한 실패자인 개츠비가 왜 위대한가를 찾으려면 그의 외면이 아닌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내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순수함'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과거에 대한 아쉬움을 항상 안고 산다. 성적, 커리어, 연애 등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항상 '그때 그랬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과거를 되돌리기 위한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에 같은 실수나 아쉬움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개츠비는 과거를 바꾸고 과거의 꿈을 현재에 재현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는 개츠비의 '순수함'에서 비롯되는데, 이 부분은 다소 의아한 대목일지도 모른다. 작품 내에서 개츠비는 불법적인 사업(약과 술)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개츠비의 순수함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으니 바로 개츠비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파티 장면이다. 이 파티는 향연과 쾌락이 가득한 모습인데 정작 주최자인 개츠비는 '닉'이 파티에 올 때까지(다시 말해 그가 '데이지'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기 전까지) 결코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개츠비가 파티라는 시공간에 속하지 않으며 파티의 속성과는 다른 속성(순수함)을 본질적으로 지닌 인물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파티 장면은 개츠비가 자신의 상업을 목적(데이지)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뿐, 불법적인 사업 혹은 그로부터 비롯되는 물질에 대한 탐욕에 구애받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쪽 부두에 끝에는 언제나 밤새도록 초록색 불빛이 빛나고 있어요



또한 개츠비의 '순수함'은 작품 내에서 그의 사랑이었던 데이지의 '속물스러움'과 대조되어 더 강조되기도 한다. 데이지는 분명 개츠비를 사랑했지만 이는 단지 개츠비가 그녀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때-군인 제복을 입은 개츠비, 화려한 파티를 열고 그녀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개츠비일 때-에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이는 그녀의 남편인 톰 뷰캐넌에 대한 사랑과도 일치해서 톰이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하고, 뺑소니 사고를 낸 데이지를 보호해 줄 수 있을 때(개츠비는 목격자이자 사고의 부분적인 책임자였기에 데이지를 보호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에 그녀가 톰에게 다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어찌 보면 개츠가 얼마나 순수하게 데이지를 사랑했고, 또 얼마나 그의 순수함이 허상과 같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만큼 개츠비의 최후에 대한 비극성이 부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성은 개츠비의 순수함을 위대함으로 승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개츠비는 결코 시대상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비록 실패하기는 했으나)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닉은 이렇게 말한다.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짧은 슬픔이나 숨 가쁜 환희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이용한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 때문이었다.


디카프리오는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연기를 보여준다. 댄디한 신사, 순수한 사랑을 간직한 남자, 자신의 꿈을 향해 돌진하는 멋진 그러나 멍청한 남자까지. 그의 연기와 그가 만들어낸 '개츠비'에 힘을 더하는 것은 담담히 개츠비를 서술하는 닉, 즉 토비 맥과이어의 목소리다. 실제로 절친이기도 한 둘의 조합은 지나치게 화려한 조명과 영상, 참신했지만 지나치게 과감했던 선곡, 자신의 기술을 자랑하는 듯 슬로 모션을 남발하는 카메라의 조합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우리는 최소한 소설이 말하고자 했던 '개츠비'만은 영화를 통해서도 만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더 많은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소설을 읽어야 하겠지만.  



P (Poor 형편없음)

우리는 과연 얼마나 우리 내면의 목소리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 우리는 그 목소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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